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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Jun 18. 2021

420~490일: 비로소 찾아온 변화의 순간

콜센터 탈출을 결심하다

콜센터 업무에 대한 부담감이 한계치에 도달해 있을 때, 잠시 번역팀에 지원을 나가 달라는 매니저의 제안은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한 달간 배정받은 업무는 홈페이지에 게재될 일본어와 영어 번역을 감수하는 작업. 방대한 양의 엑셀 데이터를 하나씩 체크해나가는 단순 노동이었지만, 지루하기는 커녕 의욕이 샘솟았다.


사실 유학시절부터 콜센터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여러 업체에 프리랜서 번역가로 등록해 영상 자막이나 홈페이지, 애플리케이션 등 다양한 콘텐츠를 번역하고 감수했었다. 수입이 불안정적이다 보니 취업을 선택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라는 사람은 말보다는 텍스트가, 그리고 고객의 주관적인 잣대에 맞춰야 하는 전화 상담보다는 뚜렷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콘텐츠 작업이 체질이었다.


고객이 보게 될 홈페이지 제작에 직접 기여한다는 사실도 무척 보람찼다. 요즘은 전화보다 온라인 예약이 대세다 보니, 사이트 표기나 번역 오류를 지적하는 고객을 자주 만난다. 상담원으로서는 관련 부서로 의견을 전달하는 게 전부지만, 번역팀에 있는 동안에는 직접 아쉬운 부분을 개선할 수 있어 성취감도 들었다.


나아가 감정이 들쭉날쭉한 고객을 상대하다가 감정 없는 데이터를 다루게 되니, 긴장과 불안이 눈에 띄게 줄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덜 버겁고, 입가에는 간간이 미소도 지어졌다. 남편도 하루를 부담 없이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나를 보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돈을 벌어야 한다면, 이런 일을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이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기 무섭게, 예약률이 오르고 콜센터가 바빠져 번역 프로젝트가 조기 종료됐다. 마음의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상담 업무에 내던져지자, 스트레스는 배가 됐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콜센터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나는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퇴사하겠다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험난했던 구직 과정을 반복할 자신도 없었고, 1년 남짓한 근무 기간이 내 짧은 인내심을 보여주는 듯해 부끄러웠다. 하지만, 변화의 순간이 찾아오자 이 모든 이유는 변명이 됐다. 어파치 직장이 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태도로 여유롭게 새 일자리를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더군다나 이력서에나 남을 근속 년수보다는 당장 내 몸과 마음의 안녕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살다 보면, 바뀌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때가 되면,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던 일이 갑자기 별 것 아니게 느껴져, 누가 말려도 나서서 해치워버리게 된다. 살을 빼거나 아침형 인간이 되는 등 생활 습관의 변화에서부터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인간관계의 변화, 그리고 퇴사나 이직을 비롯한 직장의 변화까지. 실천하지 못한 채 ‘해야지’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아직 바뀌지 않아도 버틸만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대로는 안돼'라는 생각이 차오르다 못해 터져 나온 날, 나는 곧바로 링크드인 상태를 ‘구직 중’으로 변경했다. 두 번 다시 펼칠 일이 없기를 바랐던 영문 이력서와 커버레터, 일본어 이력서와 경력 증명서도 하루 만에 업데이트했다. 일본어, 영어 콜센터 직원이 필요한 여러 외국계 IT기업에서 메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콜센터로 옮기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작가 생활과 병행할 수 있을 법한 일자리를 한 달간 탐색한 끝에, 원하는 구직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면접을 치르고 몇 주 뒤, 고용 계약서를 포함한 공식 합격 통지서가 도착했다. 재택근무 중이었기에 직속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한 달 뒤 퇴사하고 싶다는 사실을 알렸다. 놀라는 눈치였지만, 이직이 결정되었다고 하자 다정한 축하와 응원의 말을 덧붙여주었다.


사직서를 쓴 날은 쌓인 대체 휴일(대부분 콜센터 상담원은 달력에 상관없이 시프트에 따라 근무하므로, 공휴일이 있었던 달에는 대체 휴일을 쓸 수 있다)로 장기 휴가를 즐기던 중이었다. 매니저는 내가 보유한 연차를 계산해 마지막 출근 날짜를 알려주었다.


대체 휴가가 끝나고 나면, 남은 출근 일수는 고작 나흘이었다.


일본어 콜센터 표현:

いかがなさいますか。
(이까가나사이마스까)

어떻게 하시겠어요?


대표 이미지: Photo by Volodymyr Hryshchenk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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