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은 Jun 16. 2021

330~420일: 감정이 무너진 감정 노동자

우울의 늪에 빠지다

예은 씨, 고투트래블이 고투트러블처럼 들려요.
(李さん、「ゴーツートラベル」が「ゴーツートラブル」のように聞こえています。

오랜만에 출근한 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내 상담 전화를 듣더니 웃으며 발음을 고쳐주었다. 영어 단어 '트래블(Travel, 여행)'은 일본식으로 '토라루(トラベル)'라고 발음하고, '트러블(Trouble, 문제)은 '토라루(トラブル)'라고 읽는다. 두 발음이 비슷한 것도 있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게 고투트래블 캠페인을 골칫거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2월 중순, 일본 정부가 고투트래블 캠페인을 갑작스럽게 중단하면서, 연말연시에 들어와 있던 수많은 예약이 정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이미 35% 할인된 가격에 예약한 고객에게는 차액을 청구하거나 무료 취소를 요청해야 했는데, 둘 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 상품은 호텔이 휴업을 결정하거나 인원이 미달되어 차액을 내도 이용이 불가했다. 이런 경우, 강제로 취소와 환불 처리를 진행해야 했기에 당연히 고객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었다.


고투트래블 캠페인 중단 이후 첫 한 달은 콜센터에서 일하는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컴플레인을 받은 시기였다. '송구스럽지만, 정부 방침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와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등 사과 멘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지나갔다. 1년에 한 번뿐인 연말연시를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을 고객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됐지만, 불만 전화를 매일 50~60건 이상 상담하다 보면 지치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극소수의 고객은 소리를 지르거나 상담원 개인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분을 풀곤 했다. 여행 상품과 무관한 내 성별, 국적, 그리고 콜센터 상담원이라는 직업이 공격 대상이 됐다. 막상 그들의 험악한 말을 듣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일부러 흘려 들어서인지 아니면 뇌에서 저장하기를 거부해서인지, 나중에 떠올려 봐도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후 기록을 남길 때는 억울함으로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뚜렷한 감각은 기억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평소의 나였다면, 동료에게 하소연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만났다 치고 가뿐히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충격과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답답함으로 이미 내 마음에는 꽤 금이 간 상태였기에, 모진 몇 마디 말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우울의 늪에 서서히 빠져들어가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처음에는 그저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며 하루를 시작하는 정도였다. 업무용 컴퓨터를 끄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면, 작가로서의 나 혹은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잠이 들 때 내일이 온다는 사실이 두려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됐다는 절망감에 또 한 번 울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아예 잠을 자지 못했다. 몸을 괴롭혀 겨우 잠들어도 새벽에 몇 번이고 깼다. 낮에는 편두통 때문에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과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야식을 마음껏 먹어도 살이 빠졌고(지금 생각하면 이 부분은 그립다),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온종일 멍했다.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할 때 어제 일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으며, 카페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쓰러질 듯 힘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이렇다 보니, 글쓰기에서도 멀어지게 됐다. 퇴근 후는 커녕 쉬는 날에도 개인 노트북을 켤 힘이 나지 않았다. 작가라는 꿈에 대한 회의감마저 느껴졌다. 원하는 삶은 너무 아득한 미래에 있었고, 그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자신이 휘발될 것만 같았다. 매달 스스로를 갉아먹는 대가로 월급을 받아 연명하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사는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자, 뉴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극단적인 선택이 남일 같지 않았다. 기사를 읽으면 '어쩌다가'라는 한탄보다는 어디서 약이나 연탄을 구했는지가 궁금했다. 멀쩡하게 산책을 가다가도, 어느 익숙한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뿐 아니라, 전혀 나답지 않고 비상식적이기까지 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한 번 비관적인 사고 회로에 갇히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고, 그 끝은 언제나 생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정신과나 상담센터에 가볼까 싶었지만, 일본어로 받는 진료가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한국어 상담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가기에는 내가 너무 무기력했다.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라고 말해주는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 시기를 버티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우울의 늪에서 허덕이는 사이, 고투트러블, 아니 고투트래블 예약은 무사히 정리됐다. 2021년 1월 8일에 발령된 제2차 긴급사태 선언으로 콜센터에는 다시 한가한 시기가 찾아왔다.


퇴사를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채, 우울감(코로나19로 인해 회사에서 전직원에게 우울증 검사를 제공했는데, 놀랍게도 나는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과 씨름하고 있을 때, 매니저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콜센터 업무가 줄어서 다른 부서로부터 협업 의뢰가 들어왔어요. 홈페이지 번역과 체크 업무인데, 한 달 동안 해보지 않으실래요?


일본어 콜센터 표현:

申し訳ございません。
(모우시와케고자이마셍)

죄송합니다.


대표 이미지 출처: Photo by Stefano Pollio on Unsplash

Photo by Cristina Gottar
.

이전 07화 180~330일: 여행, 정말 해도 되는 거 맞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