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가정의 행복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家庭の幸福なんて諸悪の根源である)
다자이 오사무
살면서 만난 가장 어린 생명은 르완다의 한 고아원에서 본 생후 14일 된 갓난아기였다. 열악한 시설 탓인지 문화적 차이 탓인지 모르겠지만, 신생아실에 격리되기는커녕 봉사자의 품에서 품으로 옮겨 다니며 예쁨을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의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새끼손가락을 움켜쥐던 작고 말랑말랑한 손의 감촉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 태어난 직후의 인간이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여리고, 또 사랑스럽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스스로 태어날 수도 없지만,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살아 남지도 못한다. 삶의 출발점에서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 많은 경우 부모가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자녀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활동을 그들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인데도, 그토록 농밀하고 끈끈한 애착이 생긴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삶의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부모의 역할은 급격히 줄어든다. 어른이 되는 일은 세상의 전부였던 가족의 알을 깨고 나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 부모가 한시도 눈을 못 떼게 하던 천둥벌거숭이는 학창 시절을 통해 사회에 적응하는 연습을 하고,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줄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다.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면, 경제적 독립도 가능해진다.
그러다 어느새 나를 낳았을 때 즈음의 부모님 나이가 되고 나면, 불현듯 깨달아지는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도 나와 똑같은 성장 환경을 거친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고, 내 부모가 되는 건 처음이라 매일이 시행착오였음을. 이렇듯 30대라는 나이는 부모를 난생처음 동등한 인격체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고백컨데,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한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아직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다. 삶이라는 선물을 조금이라도 즐길 수 있게 된 건 고작 1,2년 전의 일. 지금도 숨이 붙어있는 한 감당해야 할 생존의 무게가 때론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왜 낳았냐’고 원망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운명론자라, 어차피 한 번은 세상에 태어날 숙명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울기밖에 못하던 핏덩이 시절 학대나 유기당하는 일 없이 건강하게 길러진 것만으로도 가슴 쓸어내릴 만큼 큰 행운이다.
내가 40대, 50대, 60대에 접어들 수록 부모님 신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서서히 힘을 잃어갈 것이다. 마치 태어난 직후의 내가 그러했듯이.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부모님의 피보호자에서 보호자로 역할이 바뀌어가겠지.
‘가정의 행복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다자이 오사무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독히 아름답다. 많은 경우 가족은, 단 한 사람을 위해 온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랑의 대상. 아직 나밖에 모르는 내가 점차 나이들어가는 부모의 ‘부모’가 되었을 때, 그런 마음으로 어머니,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