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一人一宇宙
(한 사람 한 사람 각자는 하나의 우주다)
<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중에서
남들은 다 있는데 나만 없어서 아쉬운 관계 중 하나가 바로 '불알친구'다(물론 비유적인 표현이다). 지금과 같은 SNS도 없던 시절,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거기에 대학교까지 모두 다른 나라에서 다닌 내게 '소꿉친구'나 '죽마고우'는 전설 속 유니콘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사와 전학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그만큼 헤어짐에도 덤덤해져야 했다. 3년 내내 등하교를 함께했던 중학교 동창도, 친자매처럼 의지했던 고등학교 기숙사 룸메이트도 이사 후 몇 년이 지나면 연락이 끊기기 일쑤였다. 주변 사람을 살뜰히 챙기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과거에 대한 미련을 품은 채 현재를 살아내는 법을 그땐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자라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관계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한때 모든 것을 내어줄 듯 친했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거나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던 그 많은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다행히 SNS를 통해서나마 연락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행방이 묘연한 이들도 적지 않다. 이따금 사소한 기억이 실마리가 되어 그들과의 추억이 왈칵 쏟아져내리는 날엔 가슴이 저릿해진다. 더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평생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뒤섞여서다.
하지만 이미 놓쳐버린 과거의 인연에 언제까지고 자책할 순 없는 일. 10년, 20년 지기가 없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사귐의 기간이 관계의 깊이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친구의 역할을 감당하는 단 한 명의 '단짝'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과 달리, 내가 지금 진정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20대 중후반에 만난 경우가 많다. 급격히 변해온 성장환경 때문이겠지만, 최근에 사귄 사람일수록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나와 비슷해서다. 학창 시절에는 무작위로 결정되는 반이나 책상 위치가 인간관계의 강력한 매개체였다면, 사회에 나온 뒤에는 개인적인 취향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과거의 내 모습을 모르기에 선입견이 없으며, 권태기를 겪는 부부처럼 '이미 다 안다'는 식으로 서로를 대하지도 않는다.
비록 수년간 함께 성장해오며 농익은 관계에 비할 순 없겠지만, 현재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닌 어제 함께 저녁을 먹은 사람이다. 예전에 얼마나 가까웠든, 당장 연락할 수 없는 상대라면 소중하고 고마운 기억으로 남겨두면 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한번 삶의 행적이 교차할 날을 기다리면서.
친구 관계에 있어 서로가 부동의 1순위인 '베프'도 더 이상 바라지 않기로 했다. 당장 나부터 어느 한 사람을 위해 여행이나 술, 식도락, 수다, 진로 고민 등 모든 활동의 상대가 되어줄 여력이 없지 않은가. 비록 분신처럼 여길 만한 단 하나의 친구는 없지만, 고수를 좋아하고 체력이 튼튼해 함께 동남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S와 술을 좋아하되 강요하지 않아 늘 만남이 즐거운 J, 그리고 대화 주제에 제한이 없어 함께 밤을 지새울 수 있는 Y 등 삶의 한 단면에서 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통하는 사람이 있어 내 일상은 풍요롭다.
오래전부터 인간을 '소우주'로 여겨온 동양철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인간관계를 겪으면 겪을수록 모든 이가 우주만큼이나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끝없이 팽창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 깊고 심오한 내면 속에서 나와 맞는 한 조각을 발견해, 만날 때마다 기꺼이 공유해주는 것만으로도 '소울메이트'의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