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최근 방송에서 접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다들 태어난 김에 사는 것이지
의식이나 자아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생기기도 전에 결정되는 사항이고, 살아보니 별로라고 해서 반품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모나 지능, 환경도 마찬가지.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왕 세상에 태어났으니 주어진 자원을 활용해 가능한 즐겁게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가능한 즐겁게, 잘 사는 것’도 현실에서는 결코 녹록지 않다. 먹고살기에 급급해 한평생 본인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운 좋게 꿈을 찾았다 한들 보란 듯이 쟁취해 멋지게 사는 이들보다는 실패를 반복하며 그 언저리를 맴도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꿈과 생계 사이에서 늘 고민하던 나도, 지금은 1주일 중 5일은 생활비와 취재비를 벌기 위해 하루 8시간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삶에 정착했다. 인세로 먹고사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작가로서 성장하고 독자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믿으며.
그러나 코로나19로 회사 업무도 개인 작업도 적잖은 영향을 받아서인지, 최근 들어 '오늘도 좋은 하루였어'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거나, 기대에 찬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한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 만큼 괴로운 것도 아니지만,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여러 번의 심호흡과 기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욜로(You only live once)'라는 말처럼, 한 번뿐인 인생, 현재의 행복만을 좇고 싶지만, 하고 싶은 한 가지 일을 위해 하기 싫은 아홉 가지 일을 해야 하고, 평생 밥벌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나아가 곳곳에 도사리는 불의의 사고나 병, 천재지변, 범죄의 위험까지 생각하면, ‘삶을 선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니, 오히려 삶이 선물이라면, 그것을 잘못 누리고 있는 것은 나의 탓일 테니 죄책감이 들 지경이다.
세계 어느 문화권에나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도 이토록 불확실하고 힘겨운 삶을 위로할 무언가가 필요해서는 아닐까. 대부분의 종교가 우리는 신(혹은 우주나 자연의 섭리)의 뜻에 따라 태어났고, 그중에서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큰 축복으로 여기므로. 내게도 종교가 있지만, 그마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날엔, 이렇게 생각해보곤 한다.
삶은, 그저 삶이다
굳이 중립적으로 보다면, 삶은 본능에 가깝다. 부모의 의사에 따라 간단히 만들어지는 생명이라면, 그 많은 난임, 불임 클리닉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 착상, 발육하는 확률적 기적은 분명 내가 되기 이전의 내가 본능적으로 쟁취해낸 일이니, 따지고 보면 내 책임도 있는 셈이다. 그렇게 얻어낸 생을 선물이라고 보면 선물이고, 저주라고 보면 저주가 된다. 반절 채워진 물 잔처럼.
진부하지만, '반이나' 남은 물 잔처럼 내 삶을 들여다보면,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하는 덕분에 하는 일에 비해 높은 수입을 얻고 있고, 업무 스트레스가 크긴 하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만큼은 원만하다 못해 따뜻하기까지 하다. 초보 무명작가에 불과한데도, 원고를 쓰면 출판해주겠다는 독립출판사가 있고, 사적으로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그 흔한 고부 갈등도 없이 편안한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 덕분에(정서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병이라고는 1년에 한두 번 환절기에 목 붓는 게 전부이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가족과 친척, 시부모님, 친구들이 무수히 많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내가 노력하지도 않았거나 좋아서 했을 뿐인데 거저 주어진 특혜이니, 곱씹을수록 감사할 따름이다.
삶은 선물이 아닐지 몰라도, 살다 보면 선물 같은 일이 분명 벌어진다. 물론 어려움도 적지 않지만,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는 결국 내게 달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 선물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삶을 선물이라 여기고 그것을 향유하려는 자세이니. 그러다 보면, 이따금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고통에도 점차 면역력이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