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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Jul 13. 2020

고생한 나를 위해, 달걀죽

마지막 요리

넘치는 식욕을 위장이 감당하지 못한 탓인지, 어린 시절 저는 배탈이 잦은 편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흰 죽을 끓여 주셨지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정말 얄미울 정도로 새하얀 죽을요. 배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하루 세끼 흰 죽만 먹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입맛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면 저는 몰래 김 가루도 뿌리고, 참기름이나 간장도 몇 방울 떨어뜨려 먹곤 했습니다. 그러다 들켜서 혼난 적도 있었지만, 간을 해서 먹으니 어찌나 맛있던지... 그때의 기억 덕분에 죽은 제게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로 남게 된 것 같습니다.


음식을 알아서 찾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더 이상 어머니의 흰 죽 레시피는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쯤 외국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터라 몸이 아프다고 해서 죽을 끓여줄 사람도 없었고요. 그 대신 다양한 나라의 죽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비슷한 지, 어느 나라에나 입맛 없을 때 먹기 좋은 부드럽고 따뜻한 곡물 요리 하나쯤은 있더군요.


독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땐 현지 친구를 따라 오트밀을 우유에 불려 먹은 적이 있습니다. 따뜻한 시리얼을 먹는 듯한 생경한 식감이었지만, 과일이나 꿀을 가미하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홍콩에서 대학교를 다닐 땐 피단(삭힌 오리알이나 달걀)이 듬뿍 들어간 죽 또는 ‘콘지(Congee)’가 입맛에 맞아 즐겨 찾았지요. 색은 하얗지만 짭조름하게 간이 배어 있고, 토핑은 해산물에서 고기 내장까지 천차만별입니다. 마지막에는 쪽파나 고수를 꼭 올리고요. 여기에 ‘요우티아오(油条)’라고 불리는 바삭한 튀김 반죽을 곁들이면 식감도 풍미도 한층 다채로워지지요.

 

오트밀 죽(좌)와 콘지(우) / 출처: Pixabay, oceanempire.com.hk


한국에 돌아와 자취를 하며 회사에 다닐 땐,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죽 브랜드 신세를 자주 졌습니다. 제 ‘최애’ 메뉴는 바로 단호박죽. 원래 죽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하지만, 단호박죽만큼은 식어도 맛있었기에 만사 귀찮은 자취생에게 딱이었지요. 그 후로 지금까지 일본에 살고 있어 한동안 먹지 못했지만, 진하고 달콤했던 그 맛은 지금도 여전하겠지요?


그러고 보니 일본의 죽 문화는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덜 발달한 것 같습니다. 전골 요리를 먹고 남은 국물에 죽을 끓이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이럴 땐 확고한 우동파라 주문한 적이 거의 없네요. 또, 편의점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죽을 팔긴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더군요. 아무리 바쁜 현대 사회라고 해도 죽만큼은 왠지 인스턴트로 먹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 동안 죽 먹을 일이 없었는데, 얼마 전 사무실 출근을 앞두고 병가를 내게 되어 직접 만들 기회가 생겼습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몸에 큰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근 에어컨 바람을 자주 쐐서인지, 목이 조금 붓고 기침이 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코로나 19로 모두가 민감한 상황이다 보니, 동료에게 걱정을 끼칠 바엔 하루 쉬기로 한 것이지요. 그 덕분에 이번 시리즈의 본문을 딱 10편 채우게 됐으니, 어쩌면 전화위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요리인만큼 그럴싸한 죽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 냉장고에 쓸만한 재료가 없어 주재료는 밥과 달걀이 전부입니다. 게다가 물 조절에 실패해 퍽퍽하기까지 했고요. 그래도 멸치와 다시마를 우린 육수에 끓여서 그런지, 담백하지만 제법 깊은 맛이 느껴졌습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씹을 필요도 없이 술술 넘어가는 따뜻한 죽을 먹고 있으면, 꼭 누군가가 고생했다고 토닥여주는 느낌이 듭니다. 기온은 오락가락, 마음은 뒤숭숭한 요즘, 한 끼 정도는 간단한 죽 요리로 해결해보는 건 어떨까요. 코로나19로 뒤바뀐 일상을 견뎌내느라 우리 모두 정말, 고생이 많으니까요.


재료:  
육수 - 국물용 멸치 3~4마리, 다시마 조각 1,  3~4
 - 식은  또는 햇반 1, 양파 1/4, 달걀 1, 표고버섯 1, 대파와 소금, 참기름 약간

1.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물을 끓인다. 10  다시마만 꺼낸  불을  약불로 줄이고 5분간  우린다.

2.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숟갈 두른 , 잘게  양파와 대파를 넣어 볶아준다.

3. 양파가 투명해지면, 육수와 , 표고버섯을 넣고 끓인다.

4. 물이 한번 끓어오르면, 불을 약하게 줄이고 10 이상 뭉근하게 졸인다. 이때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한다.

 5. 달걀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한 , 흰자는 4 함께 넣고 노른자는 따로 올려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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