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다'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결코 나쁜 뜻만은 아니지만, 대게 예민한 사람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반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워딩이다.
예민한 사람과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 소모를 필요로 한다. 업무를 넘어 같이 나누는 일상까지 예민함을 끌고 올 때는 정신이 피폐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가장 괴로운 사람은 본인일 것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예민한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라는 제안에 흔쾌히 Yes를 외칠 사람은 없다. 예민하고 싶어서 예민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던한 사람과 예민한 사람이 직장동료로 만나면 극과 극의 케이스가 발생한다. 한 편은 상호 보완하며 성장해나가는 케이스가 있고, 다른 편은 끊임없이충돌하며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케이스가 있다.
2년 전 예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대리와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일은 내 역사 상 잊지 못할 경험 중의 하나이다. 아직도 사람을 대하는 것이 힘들 때 이따금 그 시절을 회상하는 습관이 있을 만큼 말이다.
이대리와는 업무적으로 사소하게 부딪히는 일도 많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에게 배우는 점 또한 많았다. 나는 대체로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 생각했고 이대리는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과정 중에 생기는 조그마한 균열에도 그는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작은 불씨가 산불을 만들 듯 그저 지나칠 문제도 예민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대리의 신조였다. 꼼꼼한 이대리의 덕택으로 이빨 빠진 부분 없이 프로젝트를 끝맺음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프로젝트의 성공은 이대리의 공이 대단히 컸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억들만 남았으면 좋으련만, 괴로웠던일들 또한 많았다. 이대리는 나의 업무 스타일에 대체로 불만이 많았다. 프로젝트는 여러 부서의 도움이 필요한 일로, 다양한 인원들이 관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사공이 많은지라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종종 발생했다.
사람의 실수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이대리와 나는 반응하는 결이 달랐다. 중대한 문제이거나 반복되는 실수가 아니라면 나는 보통 '그럴 수 있지'라며 넘어가는 편이었다면이대리는 아니었다. 문제의 발생 경위와 책임에 대한 분명한 소재를 따져 묻는 타입이었다. 대게 당하는 사람들은 별 것 아닌 것에 예민하게 굴지 말아 달라 하였지만, 이대리 입장에서는 눈 감고 넘어가면 스트레스를 받았을 터이니 어떤 쪽에도 고통은 뒤따랐다. 문제는 불똥이 내게도 튀곤 했다는 사실인데, 이대리는 나 때문에 본인이 예민한 사람으로 둔갑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네가 덤덤히 넘어가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잖아."
나는 그때마다 예민하게 대응할 일이 아니라 판단했다며 문제의 소지가 생길 일이었으면 정확히 짚고 갔을 것이라고 해명을 늘어놓기 일수였다. 결국에 '나쁜 사람' 꼬리표를 다는 것은 이대리였기에 나는 주로 그의 비난을 묵묵히 인내했다. 하지만 나 역시 사람인지라 가끔 화가 날 때면 '다음번에는 너랑 똑같은 사람이랑 일해봐라' 하며 저주를 퍼붓곤 했다.
이대리는 사소한 업무 트러블들을 쉽게 감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위에서 질책을 들을 때면 온종일 그 말을 곱씹으며 자기 비하를 하다가, 끝에는 상사 탓을 하기도 하며 하루에 수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탔다.동료들에게도 별일 아닌 일에 예고 없이 욱할 때가 많아 되려 말수 없는 내가 굳어버린 분위기를 푸는 것에 애를 쓰기도 했다. 감정선에 변화 폭이 크지 않던 나는 감정 기복이 잦은 이대리의 페이스를 컨트롤해주는 데 많은 기력을 쏟았다. 어떻게 보면 이대리는 듣고 넘겨버릴 일을 넘겨버리지 못하는 탓에 마음고생이 잦은 사람이었다. 그를 보면 볼수록 연약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던 이대리가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을 때 넌지시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왔다. 예민한 나를 잘 받아줘서라는 명목이었는데, 그제야 모른 체 무시하던 피로감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민한 이대리를 멀리하곤 했지만, 옆에서 볼 때 그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대리의 시선에서는 웃으며 넘어가는 나 같은 부류가 '나쁜 사람'이었을 것이다. 싫은 소리를 뱉어야 하는 쪽이 아무래도 손해일 터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싫은 소리를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