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어야 할 때. 떠나는 것을 선택하거나 순응하고 그 자리에 있던지 둘 중 하나다. 손톱에 작은 거스러미를 잘 못 뜯어서 가만있다가도 따끔거림이 올라오는 것처럼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다. 그것은 흐릿한 과정에서 점차 뚜렷한 결정을 하게 한다. 떠날까 말까,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던 시간. 무기력에서 편안함으로 타협하려는 내가 보인다. 편안함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니까. 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아가 존재의 가치로 뻗어가 버리면 머리가 터지기 직전으로 가고 만다.
퇴사 후 본가에서 지내는 시간은 불편함과 편함이 공존한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동안 편안했다가 함께일 때 불편해진다. 불편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게 가장 아팠던 기억을 준 사람,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 이어서다. 불편한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은 그때의 나를 마주해서 치유해갈 텐데, 현재의 불편한 상황은? 결국 이 환경에서 나를 분리하게 만들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나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이 된다.
사람은 아픈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음엔 조금 더 조심하기 위해서. 아픈 기억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되면 나아갈 수 없다. 호흡은 있는데 움직일 수 없으니까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기 쉬워진다. 힘을 내보려 하다가도 가진 힘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축 늘어진다.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끊어내련다. 끊어낼 수 없는 혈연관계라면 멀리.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이 세상을 대차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거기 부정 한 숟가락 얹는 것은 브레이크를 걸어버리는 것. 전화위복이라도 힘없이 고꾸라지는 나에겐 쉽게 전복되는 길이다. 내 마음이 편한 선택을 하도록. 자신을 믿어주는 일이 나와 한 몸이 될 때까지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