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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Oct 14. 2021

도토리줍기와 길동물밥주기

뺏는 것보다야 주는 게 낫다

나는 늘 착한 척을 하면서 지내는 편이지만 겨울에는 그 증상이 한층 심해진다. 길위의 생명들에게 해로운 폭설과 추위 때문이다.


한파가 오래되면 길동물들이 걱정된다. 특히 고양이들이 걱정이다. 길고양이들은 가뜩이나 수명이 짧다. 추위에 먹을 것도 없고 몸을 녹일 곳도 없는 날이 지속된다면 당연히, 다른 길생물체에 비해 더 신경이 쓰인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동물을 좋아하고 주위를 유심히 살피면서 걸어다니고, 산책을 자주하는 나는 동네에 얼굴을 아는 길고양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제대로 거처를 돌봐주고 먹이를 챙겨주는 일을 할만큼 착하지는 못하다. 그저 마음으로나 응원하고, 가끔씩 가방에 츄르를 사서 다니다가 나눠주는 정도다. 캣맘들이 보면 행동하지 않는 위선자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난스러워 보일 수 있는 그런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 듯하다 .


지난해 겨울에는 서울에 엄청난 폭설이 왔었다. 눈이 너무 오래 쌓여있어서 고양이와 새들이 또 걱정이 됐다. 내가 아니어도 고양이 물과 밥을 챙겨주는 천사같은 사람들이 단지에 많아서 안심이었지만 새들도 불쌍해보였다. 나는 집에 남아도는 견과류들을 가지고나와서 새들이 먹을 수 있도록 길 곳곳에 조금씩 숨겨놨다. 어릴 때 마당의 새장에서 새들을 기른 적이 있어서인지, 새들을 볼 때도 포유류 동물들을 볼 때와 같은 연민이 느껴진다. 당연히 비둘기도 좋아한다.


사실은 '비둘기가 당당히 생태계의 일원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맞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강추위에 동물들이 죽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자연의 섭리를 어겨가며 다람쥐먹이나 털어가는 인간들이 할말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말마다 남산을 걷는다. 남산둘레길을 걷다보면 정말 훈훈한 장면을 너무나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꽃과 나무들, 거북이들, 크고 작은 거미줄과 거미들, 다람쥐와 진흙들을 살펴보고 있으면 그 조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평소에는 굳이 생각하지 않는 햇빛과 바람에까지 감사함을 느낄 정도다. 그런데 그 완벽한 조화를 깨트리는 장면을 간간히 보게 된다. 그건 2021년에 직접 수렵과 채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 부부가 둘레길의 곳곳을 헤집으며, 알뜰하게 그들이 지나간 길의 모든 도토리를 수거하고 있는 것을 봤었다. 그들 부부 중 아내가 팔에 차고 있는 천 장바구니에는 이미 도토리가 불룩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먹고 살게 없던 시절에 앓아누운 부모님과 배곯는 동생들을 먹이기 위한 거라면 나도 할말이 없다. 하지만 등산복을 사이좋게 갖춰입고 주말나들이에 나선 부부가 도토리를 주요 식량으로 쓰기 위해 채취하는 게 아님은 분명해보였다.


한번은 이런 광경도 본 적이 있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갔을 때였는데, 강아지 산책까지 일타쌍피로 할 예정이었어서 1층에서 꽤 오래 머문 적이 있다. 음식물쓰레기통을 내려놓고,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는 동안에 웬 청년이 계속 나를 지켜보는 거였다. 산책을 하느라 이곳저곳 왔다갔다해도 그 시선이 거둬지지를 않아서 ‘이놈의 사그라들지 않는 미모란’이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청년의 눈빛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내가 긴 산책을 마치고 들어갈 때가지 거기에 서 있어서 나는 개를 데리고 먼저 아파트로 들어갔다.  15층까지 올라온 내가 1층에 음식물쓰레기통을 두고 온 것을 깨닫고 다시 나와보니, 그는 아파트 화단 앞 나무에 열린 감을 모조리 따서 어깨에 멘 에코백에 담고 있었다.  


선조들이 감나무에서 감을 수확하면서 맨 꼭대기에 있는 감은 까마귀 꺼라고 하면서 남겨뒀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높아서 어차피 따기 힘드니까 착한 일 하는 셈 치고 그냥 놔두는거 아니고?"라며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쩌면 그 정도가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선함의 적당한 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지구는 오직 사람 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고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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