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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Oct 22. 2021

가방 안이 더러운 이유

미니백이 유행해서 다행이다


새콤달콤 껍질, 키즈비타민 껍질, 영수증처럼 생긴 영화 티켓. 빨대껍질, 사놓고 한번 쓰고 잃어버렸다고 글도 올렸던 립스틱……이런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 가방은 더럽다.


동네에 새로 연 필라테스스튜디오 전단지, 와인가게 전단지, 꼬깃꼬깃 접혀있는 컴퓨터학원 전단지……이런 것들은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착해서 길가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란 전단지는 싹 다 받아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 가방 속이 이렇게 더러워진거라고.


대학생 때 ‘썸남’이 내 가방을 열어보고 크게 실망했던 적이 있다. 좀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그 썸남은 내 가방을 들어주겠다면서 가져가서 가방을 열어보곤 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모르겠지만 가방 안이 생각과 달리 더럽다며 놀랐다고 말했었다. 그게 나도 놀랄만큼 부끄러운 사건이었어서 아직까지도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는 빅백(큰 가방)이 대유행중이어서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나도 푸대자루같이 큰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그래서 더욱 가방 안이 더러워지기 쉬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도 이런 변명을 했었다. 내가 착해서 가방 안이 더러운 거라고. 길에서 나눠주는걸 일일이 받아 챙기고, 쓰레기도 못버려서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가방이 이런 꼴일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는 것. 필요도 없는 물건으로 가방이 더럽혀져서 싫고, 추운 날에는 손도 꺼내기 싫어서 더욱 싫다는 그것. 그렇지만 아르바이트생은 할당받은 전단지를 다 나눠줘야 그날의 업무가 끝나기에, 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는 쪽이 ‘선’한 쪽이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다. 바쁜 일정 중에 전단지들을 받으면 바로바로 쓰레기통에 넣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쓰레기줍깅'까지 하는 마당에 그것들을 길바닥에 슥 버릴 수도 없다. -바닥에 버리는 게 광고효과가 더 있어서 광고주들은 좋아할 거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전단지 광고주들에게는 선하지 않은 존재였을 것 같다. 심지어 받아온 전단지의 광고를 보고 그 업체를 이용해본적도 한번도 없으니까.


아무튼 주말에 한번씩, 혹은 그것보다는 좀 더 자주, 가방 속에 가득 들어찬 전단지들을 한꺼번에 버리곤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깨끗한 가방 속보다는 ‘착함’으로 가득찬 내 가방이 더 좋았다.


다행히 지금은 가방 속이 꽤 깨끗해졌다. 결혼을 하고 집안 청소를 전담하는 입장이 되자 조금 번거로워도 쓰레기통을 찾아 바로바로 밖에서 처리하는 습관이 생긴 덕이다. 더구나 요즘은 작은 가방이 유행이라 그만큼 쑤셔넣을 공간도 없어졌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가방 안이 더럽다는 것은 고백하기 힘든, 매력없어 보이는 모습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내가 조금 번거로우면 되는데 이것저것 받아서 가방에 넣고 보는 버릇을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모든 종류의 '착한 척'에는 어느정도의 불편함이 필수적으로 따른다. 그리고 이 불편함을 어느정도 '선'까지 감수할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은 모두 다르다.


예컨대 나는 지구를 사랑한다. 그래서 비건을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너무 너무 힘들었다. 육류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초등학생 아이 식탁을 도맡은 입장에서도 비건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일단 포기하고 육식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선에서 스스로와 타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보카도를 엄청 좋아했다. 그런데 아보카도 재배가 환경에 엄청 안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았다. 아보카도 과카몰리는 여전히 끊지 못했지만 샐러드나 덮밥을 먹을 때 아보카도 대신 애호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가능해서 아직도 잘 지키고 있다.


누군가에게 자기의 선을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어떤 선 이라도 마음에 품고 있으려고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가방 안이 더러운 여자 정도는 여전히 내가 큰 불편함 없이 잘 지킬 수 있는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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