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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youngjoo Oct 22. 2021

주문형출판하기

종이가 아깝지 않은 책을 쓰기를

나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p.o.d. 출판형식이었기에 홍보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저조한 판매량의 이유였다. pod출판이란 publish on demand의 약자로, 책을 미리 인쇄해놓고 파는 것이 아니라, 주문을 받으면 그때부터 생산에 들어가는 방식이다. 이 방식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종이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문형출판은 ‘착한’ 출판의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책을 판매하면 재고가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출판사를 다루는 드라마를 보면 망한 출판사 창고의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폐기처분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다른 모든 소비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종이재고도 환경에 큰 부담이다. 플라스틱이나 다른 환경파괴 물질들에 비하면 종이는 별 문제도 아닐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지구를 살리는 기발한 물건 10> 이라는 책에서는 종이가 어떤 종인가에 관계없이, 인공조림지 자체가 이미 환경을 많이 파괴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종이사용이 비교적 적었던 예전에는 도시에서 가까운 숲의 나무를 베었지만, 대량으로 종이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원시림 한가운데에 목재공장을 세웠어요. 크고 우람한 원시림의 나무를 베어 목재로 판매하고 그 자리에 불을 질러 너른 공터를 만들어요.

그리고 짧은 시간에 쑥쑥 자라는 나무를 심는 나무농장을 만들어요. 인도네시아 열대우림과 브라질, 칠레 등 남미의 열대우림에 나무농장이 이렇게 들어섰고, 캐나다와 미국의 침엽수림,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에서도 다국적 제지공장이 숲을 무참히 베고 있어요." (88쪽)


그렇다. 작가들의 인터뷰에 “종이가 아깝지 않은 책이 되기를”, 이라거나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은 책이 되기를”이라는 구절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그 말은 결코 오버가 아닌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하지 않은 종이 소비를 줄이는 것은 정말 '선'한 일이다. ‘나무를 심는 사람’도 아닌 주제에 종이를 펑펑 쓰는 행위에 경각심이라도 가져야겠다. 종이쓰레기를 줄이기를 실천하기 위해 요즘 기업들도 전자영수증을 도입하려고 하고 있는데, 나도 선택할 수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종이영수증을 받지 않고 있는 것으로 작은 실천을 하고 있다.


책을 출간한 것도 어쩌면 환경을 위한 선한 선택이었을까? 내 책은 분명히 쓸데없는 종이의 낭비를 막았고, 심지어 많이 팔리지도 않아 더욱 종이를 아꼈다. 그렇다면 내가 대형서점 매대에 놓인 수천부의 재고를 가진 책의 작가들보다 착한 일을 한걸까?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에 대해 실제로 쓰인 책을 발견하게 되어 소개해본다.


버트런트러셀은 그의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과 기회를 모두 박탈당하게 되면 자연스런 행로에서 이탈하여 우선 스스로가 착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논리로 ‘신성함은 행동력에 있어 무능한 자들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기독교 윤리에서 사회적 미덕이 배제되고 개인의 신성함만이 강조되었다’고 설명했다. 러셀은 그런 논거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중세시대의 그림들을 들었는데, 중세의 미덕을 그린 그림들에서 덕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어딘가 시시하고 나약한 사람, 심지어 가장 덕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예 세상에서 물러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구절을 읽고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든 것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성을 굉장히 강조하고 싶어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는 사회적으로 바닥을 쳤다고 여겨지는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예컨대 착한 척이란 때로 이런 것이다.  회사에서 승진에 밀린 사람이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남을 짓밟고 살아남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속세에서의 모든 성공을 부도덕함의 소치로 몰아가는 것이다.


나는 출판사에서 낼 자신이 없어서, 찍어낸 책을 많이 팔 자신도 없어서 부크크로 출간을 했다. 그리고 책이 팔렸다는 알림이 뜰 때마다, ‘나무를 절약했다’는 위안에 빠져드는 것은 분명 자기기만이고 모순이지만, 결과적으로 착한 행위이기도 하다. 착한 일이라는 게 이렇게 묘하다. 착해지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착하다는 가면을 쓰려는 스스로를 그 늪에서 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한 이유다.


나무를 절약해서 도덕적이고 착한 나는, 이 글이 잘되어서 많은 나무를 베어가며 출간되어 날개돋힌듯 팔려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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