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계절을 겪어봐야 안다
연말이 다가온다. "올해가 가기전에 얼굴보자~"는 인사가 어색하지 않는 때가 지금(11월)부터라고 한다. 연말이면 달력이 빼곡하게 약속이 잡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올연말에는 몇개의 송년모임에 참석하게 될까? 참고로 작년엔 두개였다. 갈수록 송년모임이 줄어드는 이유는 최근의 내가 인간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아서이겠지만, 내가 속해 꾸준히 참석하는 단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것이다. 사람이란 어쨋거나 사회적인 동물이고, 함께 속해있는 집단이 있을 때 더 친밀한 인간관계들을 맺기가 쉽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계속해서 연락을 주는 '전업주부가 아닌 친구들'은 정말 고마운 존재들이다.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지다 보니 아무래도 화젯거리가 거의 없어졌는데, 그럼에도 무언가 쥐어짜서 물어봐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을 나도 내년에는 좀 더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아얘기, 가족얘기를 공유할 수 없는 친구들이 내게 말거는 화제중 선두는 단연 '남자얘기(ㅋㅋㅋㅋ)'였는데, 지난 한해에는 부쩍 '개 이야기'를 묻는 횟수가 늘었다. 요즘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개를 키우고 싶어하는 이들이 엄청 많다는걸 느끼는데, 특히 유기견입양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입양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서부터 유기견을 입양했을 때 겪게 되는 특별한 문제는 없는지까지. 사실 더 많은 전문가들이 있고 나는 단 한마리를 입양해 기르고 있을 뿐이라 크게 참고할만한 의견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내 생각을 말하자면 유기견입양전에 꼭 챙겨야할 것은 무엇보다 '1년을 참겠다'는 마음가짐인 것 같다.
유기견의 경우 어린 강아지를 분양받아 키우는 것과 분명 다른게 있는데, 그건 기초사회화를 내가 책임질 수 없어서 겪는 어려움이다. 작게는 사회성부족에서 기인하는 다른 강아지들과의 관계맺기의 어려움이고, 특히 학대를 받아 유기된 개들의 경우에는 인간에 대한 경계와 상처가 있어 더 힘든 것 같다. 이런 경우 특정 성별의 사람에게 경계심이 있어 주인을 물고 파양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새로 생긴 주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해서 분리불안을 심하게 겪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새 주인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크리스를 집에 데리고 올때, 봉사자분에게서 "목줄을 꼭!꼭! 채워주세요"라는 당부를 여러번 들었다. 우리집에 적응을 채 못한 크리스가 문만 열리면 도망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처음 한두달간은 그 걱정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나는 아예 대문 여는걸 겁나할 정도로 조심했었다.
다행히 크리스는 심각한 분리불안도 금방 극복했고, 우리 가족을 금방 주인으로 받아들여주었다. 그래서 심각한 문제는 없었지만, 산책할때 다른 개들에 대한 큰 경계심이 문제였고 아직도 이 문제를 겪고 있다. 다른 개들과 발랄하게 인사 나누고 헤어지는 모습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아직도 다른 개와 인사라도 시키려면 컹컹 짖어대서, 나는 "친구한테 왜 그래~~~"라는 민망한 말을 남기며 황급히 도망가기 일쑤다. 하지만 꾸준한 산책의 결과 적어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개에게 일방적으로 시비를 거는 행태는 급격히 줄어 들었다. 거의 일년만에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건데, 이렇게 되기까지 사실 산책할때마다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올 여름, 크리스가 산책을 꺼릴때도 정말 걱정이 많았다. 무엇보다 처음 집에 왔을 때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처음 일주일 가량, 크리스는 바깥 바닥에 발을 딛기 힘들어했다. 자기를 내려놓으면 또 다시 버려질까 두려워했던 걸까?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산책을 좋아한다는 개가 걷기조차 거부하는 모습에 어떤 상처가 있었던걸까 짐작하기 어려워 몹시 슬펐던 기억이다. 그 이후 봄 내내 산책을 즐겼던 크리스가 더운 여름이 시작되면서 다시 걷기를 거부했다. 처음처럼 땅을 딛는걸 힘들어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저 지쳐보이는 것이기는 했다. 온갖 고민을 하며 자두씨를 삼켰던 후유증인가 싶어 자책하기도 했고, 병원에 데려가 영양제 주사를 맞추기도 했었다. 처음의 그런 버릇이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과도한 걱정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서늘해지자마자 크리스는 언제그랬냐싶게, 산책이라는 글자만 입에 올려도 컹컹 짖어대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음 해 여름이 오면 크리스가 또 다시 기운없어해도, 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흔히들 '누군가를 알려거든 적어도 4계절을 다 겪어보라'고 하는데, 모든 계절을 겪어본다는 것, 그건 상대의 기쁨과 슬픔, 약점과 강점을 모두 알게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크리스는 1년간 많이도 변했다. 생각해보면 크리스에겐 힘든 적응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도 변한 생활들로 힘들었지만, 크리스가 겪었을 격변의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입양의 주체는 나였고, 항상 내가 마음먹은대로, 내 시간표대로 크리스는 따라야먄 했으니까. 그동안 크리스는 분리불안을 극복했고, 사람을 향한 경계심도 많이 낮추었으며, 우리 세 가족과 하나하나 교감을 쌓아가며 친해졌다. 무엇보다 이제는 얼굴이 다르다. 내가 사라질까 불안해하지 않는 모습만 봐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간다. 처음 입양시의 크리스는 '불쌍한 아이'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가족'이라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개를 입양하는 이들이, 특히 유기견입양에 뜻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적어도 1년은 그를 참을성있게 지켜보겠다는 마음가짐이라고. 개가 편하게 지낼만한 공간, 비상시 병원에 데려갈 최소한의 경제적능력, 여행시 맡아줄 수 있는 가족의 유무, 같은 현실적인 것들은 모두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때에야 소용이 있는 것이다. 입양을 진행하는 곳마다 다르겠지만, 크리스 입양을 할때 입양원서에 있던 항목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개가 짖어서 민원이 발생할 시 어떻게 하겠습니까? 1. 파양한다/2. 성대수술을 시켜준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2번 성대수술을 시켜준다를 선택하라고 묻는 항목이었다. 개 성대수술을 한다는건 지금의 나로서도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슬픈 상황인데, 유기견을 구조해 입양을 진행할만큼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오죽하겠는가. 그런 각오까지 해가면서도 평생을 책임져야 하는게 유기견입양이라는, 결연한 마음을 갖게 했던 질문이었다. 우리 크리스가 착하고 쉬운 아이였던 건지도 모르지만 모든 문제들은 1년안에 어느정도 해결되었다. 유기견입양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유기견이 반려견이 되는데 필요한 시간 1년', 을 꼬박 기다려줄 마음으로 새로운 가족을 맞이했으면 한다. 사람사이가 그렇듯, 개와의 관계에도 한 집단(가정) 안에서 서로 궁금해하고 챙기며 영글어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