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2021년 방영된 tvN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를 정주행했다. 배우 서인국과 박보영이 이끌어가는 판타지 로맨스는 16부를 보는 내내 나를 스크린 앞에 붙잡아 두었다. 긴 여정이 끝난 뒤, 내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다크서클은 발등을 찍어 누를 듯했지만, 마음만은 따스함과 여운으로 가득했다.
드라마의 중심에 선 탁동경(박보영)은 부모를 잃은 10살 이후로 불행만을 반복해 온 인물이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100일의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절망조차 익숙해진 그녀는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외친다.
“다 멸망해 버려!”
그녀의 외침은 인간이 느끼는 모든 절망을 집약한 것만 같았다. 그러자 그녀의 인생에 멸망(서인국)이 찾아온다. 그렇게 드라마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존재로 태어난 멸망과 탁동경이 함께 하는 100일 동안의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 그리고, 인간으로 변한 멸망과 탁동경이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는 여정으로 결론을 지으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내게 이 드라마가 특별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아마도 극 중 메시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절망과 사랑, 그리고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단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반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 역시 여러 번의 불행을 마주했었고, 때로는 세상이 모두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학창 시절,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 3개월이 넘도록 얼굴을 붉히며 다퉜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 한편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군대에서는 선임들의 이유 없는 질책과 행동에 무력감을 느꼈고, 회사에서는 부진한 성과로 인해 담당하고 있던 일들을 접어야 했다. 또한 명예퇴직으로 실직을 맞이했을 때의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처럼 내 삶의 일부는 불행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드라마 속 멸망이 탁동경에게 반복적으로 물었던 질문은 나를 불행한 생각에서 멈추게 했다.
“소원이야?”
내가 절망에 빠졌던 순간들에도 과연 행복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분명히 불행 속에도 행복은 존재했다. 작지만 커다란 행복들이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짓하고 있었다.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 긴 다툼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원하던 진로를 선택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나날들 속에도 의리 있는 동기를 만났고, 그들과의 우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회사에서의 실패는 뼈저리게 아팠지만,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를 의지했던 시간은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무엇보다, 내 삶의 가장 큰 행복은 아내와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토끼 같은 두 딸이라는 선물로 이어졌다.
* 일러스트 출처 : chatGPT
지금 돌아보면, 불행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며 부끄럽지 않은 내 인생을 그려온 것처럼, 불행 속에는 반드시 작은 행복들이 숨어 있었다. 당시에는 보지 못했을 뿐, 지금은 그 순간조차도 감사하게 여겨진다.
이 드라마가 준 메시지는 분명했다. 불행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순간에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고 느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언제든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불행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힘이라고 믿는다. 드라마 속 탁동경이 멸망에게 세상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그 의지는 작은 행복들을 끌어안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지금 내 소원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내가 찾은 행복들이 내 곁에 영원히 남길 바라.”
그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 아내와 딸들이 건네는 해맑은 웃음, 노년의 부모님 손을 꼭 잡을 때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 등 내겐 그것이면 충분하다.
불행은 지나가고 행복은 남는다. 그러니, 불행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는 불완전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