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다시 쓰기 5
그런 날이 있었다. 무엇을 해도 안될 것 같고, 자신감도 떨어져 자포자기하는 순간이 있었다. 누구도 만나기 싫었고 혼자 살아가자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그 중심에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무엇일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는 가족을 대신할 수 없다고. 그렇지만 나는 가족보다 친구가 더 좋았다. 가족에게는 내가 힘든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만 친구한테는 가능했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댈 수 있었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 감정은 내가 친구라는 존재에게 더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미성숙했다. 그 과정에서 날 좋아해 주는 친구에게는 상처를 줬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상처를 받았다. 내 감정에 솔직할수록 그 경험이 더 많아졌고 슬픈 날이 많아졌다. '그때 참을 걸'하는 순간이 늘어나고 '그냥 다 끊고 살까'라고 생각했다.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내가 한 행동을 돌아보면 내가 슬픈 것은 당연히 내가 겪어야 할 벌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속죄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다시 쓰기) 그렇게 불행하게 살면 누군가 알아주고 다가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삶에 관심을 줄 만큼 여유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나 혼자 언젠가는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던 것이다. 그 기대가 나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어느 순간 위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큰 절망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채 말이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혼자가 되어갔다. 주변 사람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도 거절했다. 그렇게 나 혼자만 살고있는 세계를 구축해나간 것이다. 그러다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에게 안부 연락이 왔을 때가 나의 터닝포인트이 되었다. 즐거웠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나는 그냥 사람 그 자체가 좋았던 것이다. 주변에서 '너 왜 이렇게 재밌어졌어?'라는 말은 '내가 다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했다. 나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슬픔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그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 다시 쓰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보면 나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생각보다 재밌는데? 왜 이렇게 재밌어졌어? 지금이 훨씬 좋은데?'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해봤다. 예전과 지금의 차이는 마인드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절제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나는 실수하지 않고 완벽하면서 착한 모범생이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해도 좋다는 마인드이다. 내가 무엇을 하면 재밌는지 상대방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 예전에는 그것을 활용할 줄 몰랐고 이제는 그 점을 확실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슬픔이란 무엇일까? 슬픔에는 정도가 있다. 슬픈 드라마를 봤을 때 느끼는 짧게 지나가는 감정이 있다면 이별을 했을 때 겪는 오래 지속되는 감정이 있다. 심각한 경우에는 슬픔은 우울로 이어지고 사회생활이 어려워지는 병이 될 때도 있다. 슬픔은 상당히 상대적이다. 내가 슬픈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가 슬퍼하는 일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이 왜 슬픈 일인지 물어보는 것은 굉장히 실례가 된다. 슬픔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오직 나의 인지로만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굉장히 나르시시스트 한 감정이다. 나는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슬프고 나는 그런 생각이 아니었지만 상대가 오해해서 슬픈 상당히 '나' 중심적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슬퍼할까? 나는 이것을 인지발달과정 중 유아기 상황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님에게 보살핌을 받는다. 처음 태어난 아기는 울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어릴 때 우리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울면서 해달라고 떼를 썼다. 이것이 슬픔의 시작이다. 내가 슬픈 것이 나에게 이득이 된다는 편법을 깨달은 단계다. 슬프기에 상대방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내가 슬퍼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슬픔의 감정을 공유하며 위로받는 일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슬프지 않음에도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슬픈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에게 이득이 됐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뻔한 스토리로 통하지 않으면 더 극단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고 그 감정이 익숙해질 때쯤 우리 인식이 감정을 완벽히 지배하게 되면서 처음부터 진짜로 우울한 사람이 된 것이다.
연기가 진실이 되는 놀라운 순간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반대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우리가 너무 슬퍼서 우울하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도 긍정적인 일과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슬프다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좋았던 일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지하는 방법은 인지와 감정은 연결되어있기에 우울했던 감정을 뒤집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심각한 상태로 우울한 사람은 인지의 부분이 손상되어있기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럴 때는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나'라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우리는 관심을 받고 누군가에게 위로받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괜찮기 때문이다.
=> 다시 쓰기)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도 싫어한다. 좋아하게 만들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도 좋아한다. 싫어하게 만들기가 더 어렵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슬픈 것이 싫었다. 그래도 내가 겪어야 할 당연한 고통이라고 생각에 슬픔에 잠겨 들어갔다. 위로를 받고 싶어도 위로받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날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때 오래된 친구에게 카톡을 받았다. 내 감정을 다 털어놓지는 못해도 넌지시 던지는 말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사실 내 슬픔은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슬픔 그 자체로 다른 친구에게 위로받을 이유가 된다는 점은 힘들었던 나에게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 감정이 내 인지를 지배했을 때 나는 진짜 슬픈 사람이 되었다. 내 감정이 나의 인지를 지배하도록 두지 말자. 슬프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인지의 힘을 기르자. 나는 슬픈 일이 많았다. 최근에도 슬픈 일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이 글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줬다. 여러 부분에서 슬펐던 경험은 나의 미래에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내가 슬픔을 인지하고 슬픔을 먹고 더 성장한 것처럼 당신도 충분히 슬퍼하고 많이 울면서 더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겠다.
=> 다시 쓰기) 내가 겪어야할 당연한 고통은 없다.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충분하다. 한동근의 '10년전의 나에게'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에 '이제 보니 내가 가장 날 미워했네'라는 말이 있다. 가장 날 좋아해주고 존중해줘야 할 사람이 가장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첫번째 과제는 지금 내가 불행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인지하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불행한 노력을 그만두고 난다면 나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