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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a Sep 11. 2024

그의 글투에서 그가 보인다 (3)

- 네 글에 네가 없다 -


# C의 글 속에서…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 작가 C.

내게서 일을 배우는 C는 글을 빨리 쓰는 편이다.

대신 정확도가 떨어져

일일이 문장을 짚어 가며 바로잡아 줘야 한다.


가령,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이 부자연스럽거나,

한 문장 안에 동의어가 두 개가 있거나,

앞에서 한 말을 뒤에서 재차 거론하기도 한다.


C가 대본을 빨리 제출할 때면,

불안해서 묻는다.


많이 검토하고 주시는 거죠?
네, 여러 번 검토했어요.



C에게서 열다섯 장 분량의 대본을 건네받는다.

하지만 첫 장을 쉽사리 넘기지 못한다.

곳곳에 엉성한 문장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길을 잃은 건지

문장이 배배 꼬여 있다.


사실 이런 식이면 뒷장은 읽을 필요가 없다.

이미 첫 장에서 모든 걸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제시해줘야 할 의무가 있어

마지막 장까지 검토하고 체크했다.


파악이 끝나고, C와 회의실에 들어갔다.

전체를 언급할 때가 아니었다.

부실하게 쌓아 올린 전체를 해체해서

기초석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글 한 줄에도 목적이 있는 법.

하나의 문장이라도 그 한 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부터 따지고 들었다.

목적이 파악되니, 그 목적을 잘 나타내기 위해

주어와 서술어는 어떠한 호응 관계를 이뤄야 되는지,

그리고 그 한 줄에 어떠한 단어를 배치해야

그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지,

세세하게 설정해 나갔다.

한 문단도 아닌,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서.


한 줄, 한 줄을 잡고 씨름하니

당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문장력 향상을 위해선 거칠 수밖에.

1년 넘게 C에게 했던 말은

글의 정확도와 객관성에 관한 거였다.


글을 빨리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쓰려고 해 보세요.


내 시각에서만 이해된 글을 쓰지 말고
다른 이의 시각에서도  
이해된 글인지 체크하며 써 보세요.



에세이 같은 사적 영역의 글이라면,

그 누구의 이해를 크게 바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공적 영역의 글은 공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위와 권력을 갖기 때문에

정확성과 객관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글이 가지는 권력이 악용돼선 안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고리타분한 사설을 C가 잘 이해해 줬다.

그리고 반복된 훈련의 효과였는지,

아니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에 질려서인지,

C는 예전보다 대본 검토가 꼼꼼해졌다.

문장력도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C글의 가장 큰 문제는 주제 전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불명확해서

산만하다는 거다.


C의 글을 읽어 내려가니 왜 산만해졌는지가 보였다.

선배들의 이 의견, 저 의견을 다 반영하다 보니

정작 자기 의견은 없는 글이 돼버린 거다.


아직은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며

직장 생활을 하는 신입 사원의 고충이

그의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럴 땐 C에게 묻는다.


이 주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결국 뭔가요?


내 질문에 말로는 잘 설명하는 C.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가 됐다.


말로 설명을 들으니까
이해가 잘 되네요.
근데 어쩌죠?
글에는 그게 안 나타나 있어요.


내 피드백을 받고서,

C는 그제야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이 방향으로
주제를 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임 편집자가
계속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거예요.


저는 아직 신입이라
제 생각에 확신이 없으니까
저보다 경력 많은 선임의 말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일단 선임의 말을 듣고 그 방향대로 풀어본 거는

헛수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땐

어느 쪽으로든 해보고 결과를 확인해 봐야

뭐가 맞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동일한 상황이 주어질 때,

C는 어떤 선택을 해야 될지

이제 알게 된 거다.


필요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참고하는 건 좋지만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야 돼요.


이 글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C님의 거예요.
선임의 것이 아니에요.


그게 개똥철학이라도
본인의 생각을 담아야 돼요.


안 그럼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글이 될 거예요.



당장은 적용하기 어려운 이말 저말을

참 쉽게도 내뱉었다.

그래도 C가 이 말을 새겨듣고 노력한다면

언젠간 C의 글 속에서

C가 오롯이 서게 될 날을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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