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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봉낙타 Feb 25. 2024

익숙한 건 싫어서

이응노

11년 전 두바이로 취직하기 전, 많은 사람들은 중동은 위험하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많은데 굳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가 뭐냐 하며 말렸었다. 맞다, 그 당시 두바이는 지금에 비하면 되는 것보단 안 되는 게 많았고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온 가족이 해외에 거주하면서 '외국물'을 먹은 나는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더 다양한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니는 일을 하면서 더욱더 외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갈망이 커진 듯. 시카고로 삼주동안 출장을 갔을 때는 시카고에서 구매대행이라도 해볼까 고민했고, 베를린 출장에 다녀온 후에는 남산의 독일 문화원에 독일어 수업을 등록했다.


2009년에는 두바이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 1월 초라, 말로만 듣던 사막 날씨와는 거리가 먼,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날이 계속되었다. 공항 입국장에서 칸두라를 입은 두바이 아저씨들이 약간 무섭기도 했는데, 왜 영어는 그렇게 잘하고 막 웰컴해주는데?


미팅을 끝내고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지금의 마디낫 주메이라(Madinat Jumeirah)라는 아랍 전통 건물 형태의 멀티플렉스에 갔다. 쇼핑몰, 레스토랑, 그리고 술까지 파는 바가 있는 두바이의 유명한 7성급 호텔인 버즈 알아랍 (Burj Al Arab) 옆, 바닷가를 끼고 있는 몰이다. 건물과 인테리어 디자인은 아랍 스타일이었고 그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외국인들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모스크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일하고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외국인인 신비한 도시였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 비행 시간만 10시간이나 되는 먼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보수적이면서도 자유롭고, 이슬람 문화이면서도 포용적이고 까다로울 것 같으면서도 개방적인 도시였다.


이쪽저쪽 알아보다가 어쩌다 두바이에 취직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 살면서 한국이었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렇지만 다른 문화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나만의 색다른 아이덴티티가 형성되고 있는 듯.



120년 전 태어난 이응노는 나보다 더 익숙한 거는 싫어한 화가였나 보다. 사랑하고 익숙했던 동양화, 태어나고 자란 고향 충청남도 홍성에서 상경하여 서양화를 배웠다. 그리고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구상도 추상도 아닌,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민족적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방식을 통합하여 만든 새로운 한국화.


이응노 '인간추상'(People abstract), 1963, collage on canvas, 91.5 x 73 cm


그리고 이응노는 55세에 자신의 예술이 세계인과 통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유럽으로 향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응노는 이 대신 잇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길거리에서 그림 재료를 찾아 '서예적 콜라주'라는 이응노만의 조형언어를 만든다.


이후 이응노는 자연의 모양을 따서 만든 우리의 상형문자와 소리와 의미를 형태로 표현한 표음문자, 표의문자는 서양의 추상보다도 역사가 깊다고 봤다. 그의 화가 여정의 첫 시작이었던 서예를 자유롭게 풀어내어 '문자추상' 작품들을 작업했다.


@이응노미술관


월드 아티스트가 되어 프랑스, 독일, 미국 스위스 등 각국의 러브콜을 받으며 작업하던 중 한국 전쟁 당시 생이별을 한 아들의 행방을 찾으러 독일에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한국에 돌아온 후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였다. 옥살이에서 먹다 남은 밥풀과 휴지, 간장 등으로 작업을 한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접한 이응노는 어울림과 평화에 관한 민중의 '사회적 미술'을 하기 시작한다. 한반도에서 수백 년 동안 민중들이 스스로 창조해 낸 민화, 무속화, 풍속화 등에서 영감을 받아 민족의 혼이 깃든 작업을 하였다.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 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 중에서. 고암미술관 편저,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한국인이지만 한국에 갈 수 없었던 이응노는 결국 프랑스로 귀화는 했지만 끝까지 한 번도 한국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익숙한 건 재미없어서 한국을 떠났고 인생의 절반을 해외에서 살았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간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점점 강해지는 것만 같다. 더군다가 이렇게 민족성 강한 이응노 작품과 같은 예술을 보면 마음이 너무 찡하다.


한국이라는 동양의 작은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이런 멋진 예술로 재탄생해서 유럽과 전 세계에 전파한 이응노는 한국에 대한,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넘쳤었다. 인생 자체도, 작품에도 혁신에 혁신을 멈추지 않았던 그가 그렸던 한국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이 또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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