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서를 받기까지, 땀과 설득의 기록
형사사건에서는 합의 유무가 굉장히 중요하다.
합의가 되면 아예 처벌 자체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고, 처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합의되지 않은 경우와는 형량이 크게 차이가 난다.
따라서 형사사건에서는 가능한 한 합의를 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보통은 의뢰인에게 스스로 피해자와 합의를 해오도록 안내하지만, 사정상 변호인이 합의를 위해 의뢰인을 대신해 상대방을 직접 찾아가서 사죄하고 합의서를 받아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한 대학생이 학교 여자화장실에 들어가서 휴대폰으로 몰래 여성의 신체를 촬영하다가 적발되어 이른바 ‘카촬죄’로 기소된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는데, 사건의 특성상 변호인인 내가 직접 피해자 측과 합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는 처음에는 피해감정이 심해서 합의를 완강히 거부하였지만, 진심 어린 사과의 표현을 잘 전달한 끝에 합의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더운 여름날 다른 재판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는데, 피해자가 합의를 결심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해자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합의서를 받아오기 위해 급하게 근처 PC방에서 합의서를 작성해서 피해자가 있던 대학교로 찾아가게 되었다.
피해자는 처음에는 서류를 들고 땀을 줄줄 흘리며 헐레벌떡 오는 나를 보고 안쓰러웠는지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합의서에 서명을 하려고 보니 의뢰인에 대한 피해감정이 올라왔는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대로 합의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피해자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피해자는 단호했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하고 나중을 기약하며 같이 이야기하던 대학교 도서관 회의실에서 나가려는데, 들어올 때에는 자리에 없었던 근로장학생이 원래 출입구에서 학생임을 인증해야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니 학생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피해자는 도서관 자기 자리에 학생증을 두고 왔으니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마침 그 학교 출신이던 나는 졸업생임을 밝히고 학번을 불러줘서 문제없이 나올 수 있었다.
피해자는 내가 같은 학교 졸업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에게 ‘이런 사건에서는 합의금을 얼마 받아야 하느냐. 합의서를 쓰려면 신분증을 첨부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가해자에게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아니냐’ 등의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성의껏 답변해 주며 걱정을 덜어주자 그대로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서 합의서를 작성해 주었다.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끼리 만나면 상대방이 하는 말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고, 경험상 법적분쟁을 겪고 있는 사람은 방어적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 짙은 것 같다.
피해자도 처음에는 내가 가해자의 변호인이니 어떻게든 합의를 하려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같은 학교 출신 선배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같은 말도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합의서를 제출한 결과 유사사건 형량보다 훨씬 적은 형량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합의가 쉽지 않은 사건에서 직접 합의를 진행하게 되면 피해자 측의 입장도 함께 헤아리고, 이를 피해자에게 전달하며 조금이라도 라포를 형성한 다음에 본격적인 합의시도를 시작한다.
주말에 몇 시간씩 이동해서라도 피해자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는 것은 기본이다.
합의금을 많이 주겠다고 하면 알아서 다 합의해 주는 거 아니냐고?
사람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