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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강스백 Jan 10. 2019

너희 아빠 여자 친구는 없었니?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야.’
오랜 친구가 카톡 프로필에 저 문구를 써놨다.
‘오지도 않고 뭐 저딴 글을 써놨대?’
아빠 장례 때 오지는 않고 저렇게 써놓은 게 불쾌했다. 며칠 전까지 아기 백일이라며 연락을 주고받아서 더 서운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최근까지 연락을 했던 지인들에게만 부고를 했다. 친구의 아기가 돌잔치라 바쁘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 친했다지만 10년도 넘게 안 보고 살다가 갑자기 엄마 돌아가셨다고 알리기도 좀 그래서 연락을 안 했다. 장례 마치고 한 달 정도 후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미안하다고 몰랐다고. 너무 미안해했다.

다른 한 친구는 엄마 장례식장에 와서 왜 자기에게는 연락을 안했냐고 따졌다. 그 시끄러운 장례식장에서 핸드폰을 뺏어 자기 이름이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까지 했다.
‘아... 부고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모두 해야겠구나. 상대방이 서운할 수도, 미안해할 수도 있구나.’
그래서 아빠 장례 때 모두에게 알렸다. 사고로 돌아가셔 더 우울했던 아빠의 장례식.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면 금슬이 좋았을수록 더 빨리 새장가간다더라. 너희 아빠 여자 친구는 없었니?”
소갈딱지 친구의 말도 그냥 지나쳤는데 유독 오지 않은 한 친구가 거슬렸다.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니. 나에게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는데 아빠 장례 때문에 내가 예민하게 생각한 것이었을까?

내 아기도 백일이었고, 친구들도 만삭이거나 아기가 어린 경우가 많아 아빠의 장례식 때 못 온 친구들이 많았다. 미안하다고 문자가 왔다. 경조사에 안 왔다고 서운할 것도 없는데 그렇게 냉정하게 연락을 끊은 친구 하나 때문에 며칠 잠을 못 잤다.

내 구미에 맞는 위로를 바라고 있었나 보다. 행복한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면 내 불행이 좀 덜어질 것 같았다. 내 눈에 완벽해 보이는 그녀. 어렸을 때부터 똑똑해서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다. 얌전하고 예쁘다. 감사하며 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남편도 전문직에 행복한 가정. 때 되면 해외여행 가고 나들이도 자주 다니는 여유로운 생활. 그 친구의 행복을 나도 가지고 싶었다. 그 친구가 나를 위로해 줬으면 슬픈 게 덜어졌을까? 친구에게 속상했던 마음은 나의 열등감이었다.

가끔 보는 친구의 모습은 여전히 곱다. 생머리 길게 늘어뜨리고 아가씨같이 예쁘다. 여전히 감사가 넘치고 여전히 행복하다. 나와 친구의 인연은 아빠의 장례에 오지 않아 정리가 돼버린 인연일까? 그저 과거의 인연이었을 뿐이다. 지금이 인연이 아닐 쁜.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도 서울에서 와준 친구, 만삭이라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친구, 어머니와 함께 와서 울어준 친구, 버스 타고 와서 막차 타고 간 친구. 난 이미 많은 위로를 받았다.

아빠의 친구들은 멀리서도 다 왔다. 어릴 적 봤던 삼촌들도 보였다. 술 마시고 미운 짓만 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아빠의 인맥은 대학교, 입사동기, 후배들 다 왔다. 봉식이 아저씨는 3일 내내 장례식장 구석에서 안주도 없이 술을 마셨다.
“정승집 개 죽은 데는 가도 정승 죽은 데는 안 간다”는 말이 무색했다. 공직에서 퇴직해버리면 끝난 것이라고 그전에 자식들 결혼시키려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아빠의 술친구 세 명은 초라하게 가버린 아빠 곁을 끝까지 지켰다. 매일 술 마시고 실수하고 취한 모습들이 싫어 많이 미워했던 사람들이다. 부끄러웠다. 못난 큰딸의 친구와 비교되었다. 죄송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지만 아빠는 혼자되는 게 많이 두려웠다 보다. 엄마 먼저 보내고, 나 결혼시키고, 같이 살던 여동생마저 결혼하니 마음이 허전했을까. 엄마가 하늘에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데려가 버렸을까?

아빠는 생전에 엄마를 많이 괴롭혔다. 술주정 때문이다. 맏이인 나에게도 술주정으로 잠을 못 자게 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마누라에겐 더 심했을 것이다. 그다음 날 기억을 못 하는 아빠, 술 깨려 하면 난폭해지는 아빠. 사람들은 아빠가 괴롭혀서 엄마가 먼저 죽은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렇게 엄마를 먼저 보내고 아빠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사고 치는 것을 반복했다.

 주말 저녁.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고 좀 늦게 들어왔다. 동생들도 놀러 나갔는지 신발이 없었다. 주방 불만 어둡게 켜져 있었다. 아빠는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빈 소줏병이 다섯 병도 넘었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눈에 띄면 또 잔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아빠는 연신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아빠가 인사한 쪽을 보니 거기엔 아빠와 엄마가 중국에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엄마는 활짝 웃고 있었다. 중국에 다녀와서 엄마가 사진이 마음에 든다고 크게 인화해 액자에 걸어놓은 사진이다. 아빠는 엄마에게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고 있었다. 술주정이고 내일은 또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걸 본 나는 아빠를 알코올 중독자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초등학교 옆에서 한참 담배를 피웠다.

엄마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만 걱정했다. 아빠는 엄마가 죽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다.
“니들이 아빠 챙길 것 같지? 마누라 없으면 사람이 얼마나 추해지는데... 정신이라도 차리고 살아야 할 텐데.”
“엄마가 살아서 아빠 챙기면 되잖아. 왜 그런 말을 해?”
“그런데 아빠는 왜 안 와? 아빠가 나 돌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빠 어딨어?”

아빠는 엄마가 죽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다. 거의 술만 마시고 돌아다녔다. 밖에서는 음주사고를 내고, 집에 들어와서는 나를 새벽까지 괴롭혔다. 아침이면 다시 나갔다. 그런 아빠를 증오했다. 불쌍하면서도 미웠다. 평생을 술로 살아온 인생. 술만 빼면 돈도 잘 벌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했다.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도 많지만 나는 불행했다. 남들에게는 호탕한 술꾼이었고 집에서는 폭군이었다. 참지 못한 여동생은 자고 있는 아빠의 얼굴에 가방을 던졌다. 아빠 차에 빨간색 락카를 뿌려놓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정상은 아니었다. 뭘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 갈피를 못 잡았다.

집 마당에는 수선화와 히아신스가 만개했다. 꽃향기가 엄청났다. 햇볕은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집이 대궐 같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동화 같다고 했다. 예쁘고 큰 집에 사는 우리 가족은 허구한 날 싸웠다. 불행했다. 우리는 완전한 혼자이지 못했다. 결핍된 사람들이었다. 아빠는 술 먹고 한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는 아팠다. 나는 시간이 없었다. 잠을 자지 못했다. 매일 가위눌리고 악몽을 꿨다. 완전한 혼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니 시끄러웠다. 니 책임, 내 책임, 옳고 그름. 모든 것이 싸움거리였다.

그런데 엄마가 죽고 나서 혼자되니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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