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위에 붉은 꽃이 피어 있는 듯
산의 매력은
산의 다양성과 그 무한함에 있다.
산 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그곳에 새가 있고 연못이 있고 바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안데스 산맥의 광활한 대지도 마찬가지였다. 2박 3일 일정의 우유니 소금 사막투어는 첫 날을 소금 사막에서 보내는 것이었고 둘째 날과 셋째 날은 안데스 산맥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소금 사막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투어였지만 안데스에는 숨겨진 보물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높이 솟은 산이 품은 광활한 대지와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풍경. 그곳 또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 앞 글, '살라르 데 우유니'에서 이어집니다.
별빛이 쏟아지던 안데스의 밤은 추웠다. 소금 벽돌로 지어진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황량한 대지로 향했다. 하얀색 소금이 흩뿌려져 있던 땅은 조금씩 적갈색으로 변해갔고 지프는 흙먼지를 휘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자갈과 모래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덜컹거림. 창 밖에는 생기를 찾을 수 없는 잎을 가진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다. 푸석한 흙에 힘없이 뿌리를 박고 있는 식물들이다. 그것들이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이곳이 또 다른 사막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 소금 사막의 흔적이 조금씩 옅어진 안데스 고원. 메마른 땅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이곳에도 지평선 끝까지 철로가 놓여 있다.
태양이 내리쬐는 대지는 금방 달아올랐다. 침낭 속에서도 몸을 떨어야 했던 간밤의 추위는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지프 몇 대가 나란히 달려 도착한 곳은 저 멀리 활화산이 보이는 언덕이다. 화산 근처까지 다가가지는 않았다. 오늘 우리는 하얀 호수(Laguna Blanca), 녹색 호수(Laguna Verde) 그리고 붉은 호수(Laguna Colorada)에 들를 것이었고 그곳에 살고 있는 플라밍고를 보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플라밍고를 보러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화산의 꼭대기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막에 홀로 솟아 천천히 숨을 내 쉬고 있는 화산. 화산에서는 언제나 생기가 느껴졌다. 나는 화산을 볼 때면 산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뜨거운 용암을 품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는 화산은 때가 되면 그것들을 흘려보낼 것이다.
※ 저 멀리 화산이 보이는 곳에서 여행자들은 잠시 쉬어갔다.
지프 운전기사는 '플라밍고(flamingo)'를 보러 간다고 했다. 하얀 호수에는 플라밍고가 있다고 했다. 하얀 호수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붉은색 의상을 입고 정렬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춤 플라멩코(flamenco)를 생각했다. 플라밍고의 도도함과 정열의 플라멩코. 그 둘을 잇는 유일한 연결고리를 있다면 붉은 옷을 입은 우아한 자태 정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봤다. 호수의 수면 위에 서 있는 플라밍고 무리.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물속에 주둥이를 넣고 있을 뿐. 고요함이 깃든 호수 위에 붉은 꽃 몇 송이 피어있는 듯, 그들은 도도한 자태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소금 사막의 대지가 구름을 품었듯 이곳 하얀 호수도 구름을 품고 있다. 건너편의 언덕과 호수의 표면이 만나는 곳에서부터 만들어진 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에 날아든 플라밍고. 사람들이 구름을 담고 있는 하얀 호수를 찾는 이유가 있다.
하얀 호수가 물속의 미네랄 성분 때문에 '하얀 호수'라고 불렸다면 두 번째로 찾은 '녹색 호수'는 물속에 비소(砒素, 독성을 가진 물질로서 원소 기호는 As)를 비롯해서 납, 구리 등의 중금속이 많이 녹아있었고 그것들로 인해 호수가 초록빛을 띤다 해서 녹색 호수라 불렸다.
녹색 호수는 하얀 호수보다 규모가 컸지만 탁한 느낌이 강한 곳이었다. 하얀 호수가 맑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약간은 둔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녹색 호수는 옅은 에메랄드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톤의 옅은 청록빛으로 뒤덮인 호수에 다가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섬뜩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안내 표지판이었다. 해골 표시와 절대 담뱃불을 호수 안으로 던지지 말 것을 알리는 표지판. 이곳 역시 아름다움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를 이를 의아하게 만든다.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녹색 호수였지만 플라밍고들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장소 인듯했다. 하얀 호수에서 그랬던 것처럼 플라밍고들은 가만히 서서 호수에 주둥이를 담그고 있었다. 위험을 알리며 접근하지 말 것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녹색 호수에서도 플라밍고들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던 것이다.
녹색 호수의 아이러니. 호수와 플라밍고를 바라보며 점식 식사를 마친 우리는 차를 타고 광활한 대지를 달렸다. 지프는 안데스 사막의 정점을 향해 달린다. 해발고도 5000m. 우리는 달리 사막(Salvador Dali Desert,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이름을 딴 곳)이라 불리는 곳을 지난다. 바다에서부터 5000미터나 위로 치솟은 곳에 이처럼 넓고 메마른 땅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오랜 세월 동안 넓은 대지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을 옴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바위는 아래쪽이 홀쭉해져 있었다. 그곳의 바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걸작이 아닐 것이다. 석회동굴의 종유석이 수 천 수 만 년 동안의 물방울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처럼 이곳의 버섯 바위도 오랜 시간의 인고 끝에 생겨난 자연이 만든 걸작이다. 5000미터 고지에 위치한 사막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곳이었다.
※ 점심 식사를 마친 여행자들은 비포장 산길을 달린다. 이런 험난한 곳에도 생명체가 산다니. 돌무더기 길을 지나다가 발견한 토끼에게 토마토를 던져 주었다.
※ 5000미터 고지 위의 평원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곳이었다.
지프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온전한 도로가 있을 수는 없는 법. 하루 종일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지프의 덜컹거림을 느껴야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목적지는 붉은 호수.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호수를 굽어보는 언덕에서 보이는 붉은 물결. 붉은 댐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한 기분.
미네랄의 하얀 호수, 비소의 녹색 호수가 있었다면 이번에는 박테리아의 붉은 호수다. 물속에 있는 박테리아가 호수를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묵직함이 느껴지는 코랄빛으로 점철되어 있는 호수. 그 중간에는 라테의 우유 거품이 부드럽게 놓인 듯 새하얀 거품이 일고 있다. 호숫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라마. 지금까지 보았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지만 아늑함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이제 안데스 산맥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투어 2일째, 안데스 산자락에서 맞이하는 밤은 여전히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