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는 고사하고 세수도 제대로 못하던 우리들이었다.
여전히 차가운 밤. 안데스의 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별 반 검은 하늘 반이라는 안데스의 밤하늘이었었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앞에서는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낭만을 유지할 수 없었다. 숙소에는 히터도 난로도 없다. 건물은 단지 비와 바람을 막아줄 지붕과 벽, 창문이 있는 공간일 뿐이었다. 우리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유일한 도구는 술이었다. 투어에 왔는데 술이 빠질 수는 없다. 두 번째 밤. 투어의 마지막 밤이다. 볼리비아산 와인으로 흥을 돋우지만 운전기사는 우리에게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한다.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한다. 조금만 더. 에드손의 악기 연주가 이어졌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벽은 바람소리를 내며 울었다.
※ 앞 글, '안데스의 숨겨진 보물' 에서 이어집니다.
"LC, 일어나라고!"
마그다가 나를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4시 30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다. 다들 어둠 속에서 헤드 랜턴을 밝혀가며 짐을 챙기고 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더 이상 눈을 감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지금 떠나야 한다고 했다. 모두들 짐을 챙겨 나간다. 팀원들이 나를 흔든다.
"정신 차려 LC. 지금 나가야 해. 어제 늦게까지 놀더니 꼴좋다. 어서 나와."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어둠 속에서 배낭에 침낭을 쑤셔 넣었다. 숙소는 텅 비어있다. 밖에는 내가 타야 할 지프 한 대만이 불을 밝히고 서 있었고 나는 황급히 지프에 올랐다. 내가 차에 오르자마자 지프는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아차. 그제야 론니플래닛 라틴아메리카 스페인어 회화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혹시 내 물건을 챙겨 온 사람이 있냐고 물었지만 있을 리 없다.
"거봐, 일찍 일어나서 짐 챙기라고 했잖아."
마그다가 내게 핀잔을 준다. 안데스는 아직 묵직한 어둠이 감싸고 있다. 지프는 어둠 속을 달렸다.
"이렇게 일찍 어디로 가는 거야?"
화산(Volcano).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에밀리가 말했다. 이렇게 일찍 화산에 간다고? 창 밖에는 졸린 표정의 내 얼굴이 비칠 뿐이다.
지평선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둠은 서서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한참을 달려온 지프는 조금씩 속도를 줄였다. 냄새는 더욱 강렬해진다. 온 사방에 하수구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앞쪽 저 멀리 하얀 연기가 뿜어져나오고 있다. 지프는 멈춰 섰고 우리더러 저쪽으로 가보라고 한다.
땅에는 곳곳에 큰 구멍들이 나 있었고 그 구멍과 갈라진 땅의 틈새에서 연기들이 치솟고 있었다. 냄새의 원인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황산 가스가 포함된 연기가 마구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활화산의 흔적들. 이 땅 아래에는 용암이 들끓고 있을 것이다. 땅 속 깊은 곳에서 그것들이 끓고 있다는 것을 이 연기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멍과 땅의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산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활화산 지대에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관광지화 된 사화산이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쉬고 있는 활동이 멈춰버린 (사실상 사화산이라 여겨지는) 휴화산에는 가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온 사방에 연기가 솟구치면서 황산의 흔적이 내 코를 찌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과 같은 매력이라 할까. 냄새는 상당히 거북스러웠지만 그 땅은 매우 매력적인 곳이라 할 만했다. 구멍 속을 들여다보면서도 혹시라도 구멍 아래로 떨어져 버릴까 봐 조마조마해야 했고 갑자기 화산이 터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기도 했다. 화산 지대를 둘러보는 동안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다. 해뜨기 전이 가장 춥다고 했던가. 어둠과 함께 추위도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주위가 완전히 밝아졌을 때 우리는 차에 올랐다. 다시 졸음이 몰려온다. 투어의 가장 큰 단점이자 고통. 내 의지와 상관없는 강행군이 이어진다. 우리는 모두 지쳐있었다. 피로와 무기력에 지배당한 우리는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비포장 도로의 덜컹거림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지프 운전기사는 환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Hot spring & baeakfast"
으응, 온천? 우리는 온천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아구아스 테르말레스(Aguas Termales). 노천 온천. 화산활동의 부산물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여행자들. 그리고 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 그곳에 마련된 작은 식당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여행자들은 자신의 지프가 떠날 때까지 노천탕에 몸을 푹 담글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수영복을 입고 노천탕으로 뛰어들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얼마만인가. 모두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투어를 시작한 지 3일째.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도 제대로 못하던 우리들이었다. 연일 사막의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세수와 양치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던 우리들이다. 위생, 청결과는 반대의 길을 달려온 우리들에게 아침의 온천욕은 뜻하지 않은 행복이었다. 지프들이 하나 둘 씩 온천을 떠나갔다. 우리는 조금만 더 있자고 운전기사에게 떼를 썼지만 그는 단호했다. 갈 길이 멀다.
온천을 떠난 여행자들은 대부분 칠레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San Pedro de Atacama)로 넘어가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인 '우수아이아'로 향했지만 우리 팀은 모두 우유니로 돌아왔다. 나는 라파스로 돌아가야 했고 마그다는 포토시(Potosi)로 갈 것이라 했다. 에밀리와 로신은 수크레(Sucre)로 그리고 아드리아나와 에드손은 동쪽 산타크루즈(Santa Cruz)로 간 다음 브라질로 돌아갈 것이라 했다. 다음 행선지는 모두 달랐다. 지프는 2박 3일간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했다.
※ 우유니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풍경들. 바뇨(Bano)는 '화장실'이라는 뜻이다.
※ 점심 식사를 마친 뒤 그늘에 앉아 쉬는 중이다(왼쪽). 에드손은 솥뚜껑을 두드려가며 음악을 만들어냈다. 능력자.
온천에 몸을 담갔을 때 느꼈던 노곤함. 이제 투어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 몸의 긴장이 풀려왔다. 우유니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플라멩코와 라마.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솟은 화산들. 지프는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우유니로 가는 길에는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마을. 무너진 흙담. 풀이 파릇파릇하게 자라 있는 개천에는 물이 흘렀고 라마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평화. 너무나도 조용해서 숨소리마저 죽여야 할 것 같았던 마을. 우리 팀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에드손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악기로 만들었다. 그는 브라질의 실험적 뮤지션이었고 다양한 도구로 소리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어냈다.
우유니에서 돌아오는 길.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일은 여행자에게도 지프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운전기사는 사막 투어를 다녀오면서 펑크가 안 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구멍난 타이어 때문에 지프가 길가에 주저 앉은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우유니로 돌아온 우리들은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시간은 저녁 7시였다. 투어는 끝났고 뒤풀이를 시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