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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Apr 26. 2016

내 생애 최고였던 어떤 날에 대한 이야기 : 아마존강

여행자라는 하나의 인종만이 존재했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다.
매일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 영화, '어바웃 타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여행자라고 해서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관광 책자에 나오는 설명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시장에서 과일을 사다가 친구들과 나눠 먹는 일. 그것 외에는 해먹에 누워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지루한 일이 아니었다. 아침의 강물은 정오의 강물과 달랐다. 하루에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강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해 질 녘의 강은 베일에 가려진 신부가 모습을 드러낸 듯,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0 장소 : 브라질 아마존강.


  급할 것은 없었다. 내 여행도 예정된 끝을 향해 가고 있었기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것을 건너 뛰어가며 더 빨리 갈 필요는 없었다. 선착장에서 지낸지 4일째가 되었을 때 내가 타야 할 배가 모습을 드러냈고, 5일째 밤이 되었을 때 배와 선착장을 동여매었던 밧줄이 풀렸다. 물결을 가르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배 위에 모인 여행자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은 이제부터 아마존 강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우리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배 위에서의 시간이었다.


※ 아마존강의 모습은 매 순간 바뀌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항상 다른 느낌을 전해주는 아마존은 경이로웠다.

※ 배가 선착장에서 멀어졌을 때 바라본 마을(왼쪽).

※ 배가 출항하자 배 위에서는 파티가 시작되었다(왼쪽). 배를 타고 떠나는 이들을 배웅 나온 사람들(오른쪽).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은 강. 마을 주변을 지날 때 드문 드문 불을 밝히고 있는 강변의 집들이 보였지만 그마저도 금세 사라져버렸다. 캄캄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희미한 별빛. 세상에는 오직 어둠 속에서 홀로 불을 밝히고 떠가는 아마존 강 여객선 한 대 뿐이었다.

  배의 3층 매점 앞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배가 출발하는 그 순간부터 환호성을 질러댔던 우리들의 파티는 끝이 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댄스 음악이 끝나면 발라드가 나왔고 그러다가 또다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짝을 지어 춤을 췄다. 음악에 맞춰 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더러는 카드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파티는 매점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매점의 불이 꺼지면 스피커의 음악도 함께 멈췄고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었다. 털털털털- 쏴아- 철썩.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는 힘겹게 돌아가는 배의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사이로 물살이 배에 부딪으며 내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배는 적막을 뚫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 태양이 강렬한 낮에는 모두들 해먹 위에 누워 시간을 보낸다. 햇살이 사그라들면 갑판으로 나오는 여행자들.

※ 아침해가 떠오를 때의 아마존강.


  아침은 고요했다. 배 위든 숲이든 강이든. 모든 것이 단조로워 보였다. 잔잔한 물결의 황토색 강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숲은 계속 숲이었다. 아침에는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어젯밤 파티의 여운이 남아 있는 아침, 여행객들은 주로 해먹 위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해먹에 눕기만 하면 강과 숲이 보였고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 주었다. 간밤의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 여행자들은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었고 간간이 배의 뒤쪽 난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털털털털- 쏴아-쏴아. 엔진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배의 모든 것은 아마존 강에 의지하고 있었다. 샤워실에 마련된 샤워기는 펌프로 끌어올린 아마존 강물을 뿜어냈고 사람들은 강물로 몸을 씻었다. 많은 양의 식수를 실었지만 그것은 음식을 하거나 갈증을 느낄 때나 제공되는 것이었을 뿐, 몸을 씻을 때는 황톳물을 사용해야 했다. 강의 모습은 단조로웠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 포르투 베유의 선착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 위를 흘러갈 때도 강은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끔은 요란하게 소나기를 뿌리며 배를 흔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 금방 밝은 햇살을 비치며 미소를 지었다.

  한낮의 태양. 절정의 더위와 함께 시에스타 시간이 지나면 여행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여행자들은 주로 낮잠을 청했고, 하나둘씩 깨어나면서 파티의 분위기가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해 질 녘이 되자 모두들 배 뒤쪽 갑판으로 모였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기 전, 오늘도 멋진 하루를 만들기 위해 준비를 했다.


※ 해 질 녘의 아마존. 지금부터 파티가 시작된다.
※ 라틴 댄스와 왈츠의 향연이 펼쳐지는 장소. 어둠이 찾아온 아마존에서 음악과 춤 그리고 술을 빼 놓을 수 없다.


  하늘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면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된다. 언제나 시작은 술과 함께다. 매점이 열리고 스피커에서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오면 모두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흥얼거린다. 밤이 되면 정열의 남미가 본색을 드러냈다. 음악과 함께 춤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왈츠와 탱고 그리고 라틴댄스의 향연. 배 위는 춤판이었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LC, 라틴 댄스 출 줄 알아? 왈츠는? 같이 출래?"

  난간에 기대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내게 파울리나가 춤을 추자고 했다. 마르코는 내게 무대로 나가라고 말하며 환호를 질렀다. 갑판은 서로 짝을 지어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리듬을 타면서 내 스텝을 잘 따라와. 하나 둘, 하나 둘"

  파울리나는 천천히 리듬을 타며 움직였고 내게 잘 따라오라고 말하며 나를 리드해 나갔다. 나는 스텝이 꼬였지만 천천히 한 발 한 발 파울리나의 스텝을 따라갔다다. 음악에 맞춰 몸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움직일 즈음이 되자 파울리나는 내 손을 잡고 한 바퀴 휙- 돌았다. 모든 여자들이 한 바퀴 돌면서 파트너가 바뀌었다. 나는 새로운 파트너와 손을 맞잡고 또 한 번 스텝 맞췄다.


  춤판이 끝나자 우리는 둥글게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며 음악을 연주했다. 여행을 하면서 들고 다니는 악기는 다양했다. 바이올린, 기타, 젬배, 트라이앵글과 캐스터네츠와 탬버린까지. 다양한 악기들이 모여 합주를 하며 또 한 번 파티의 흥을 돋웠다. 배 위에는 한국,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페루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여있었지만 배가 움직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인종, 국가, 언어 그 어떤 무엇도 우리들 사이의 장벽이 되지 않았다. 배 위에서의 대화는 주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이루어졌고 나의 언어는 한국어와 영어였지만 아무도 이를 개의치 않았다. 댕기 머리를 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안드레이가 내게 말했다. "LC, 넌 음악으로 우리와 소통하고 있어". 배 위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었고 그들은 나와 함께 웃었다. 그곳엔 여행자라는 하나의 인종만이 존재했다.


※ 둥글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하고 카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아쉬움이 깃든 마지막 밤.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도 여전히 모여 앉아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창 흥이 올랐을 때, 누군가 소리쳤다.

  "매점에 술이 다 떨어졌어"


  매점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던 술이 다 떨어졌다는 소식. 흥을 돋울 수 있는 도구가 하나 사라졌다는 데 모두들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이미 우리는 즐거운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애상적 분위기가 묻어나는 마지막 밤. 우리는 어제보다 더 치열하게 오늘을 즐기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젯밤, 그리고 그저께 밤에도 그랬듯이 흐르는 강물 위에서 음악에 몸을 맡겼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모두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배 위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떠난다는 것은 계획이었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이었다. 서로에게 최고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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