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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C May 02. 2016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남자 : 브라질-베네수엘라

영롱한 피리 소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몸추게 했다.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 바그너.

  새벽부터 무겁게 떨어지던 비는 아침이 되어서도 그칠 줄을 몰랐다. 마나우스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항구 저편의 도시는 빗줄기에 가려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수 십 척의 배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아마존 강은 마치 바다와 같았다.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강. 묵묵히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는 강은 적막에 잠겨있었다. 쏴아아아아-, 격렬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나는 해먹에 누위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0 장소 : 브라질 마나우스 - 베네수엘라 산타엘레나데우아이렌/시우다드 볼리바르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배에 실려 있던 짐들을 선착장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양파 수 백 포대와 여러 가지 야채들. 아마존의 밀림 지대에서 재배된 다양한 채소들이 선착장에 쌓였다. 나는 배 안에 배낭을 맡겨둔 채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어설픈 포르투갈어를 더듬거리며 사람들에게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제부터는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마나우스 북쪽의 보아비스타로 간 다음 국경을 넘어 베네수엘라로 갈 생각이었다. 2주. 예상보다 긴 시간 동안 아마존 밀림지대에서 시간을 보낸 터라 무작정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마나우스의 버스 터미널에는 보아비스타로 떠나는 야간 버스가 있었고, 나는 한 치의 고민 없이 버스 티켓을 구입했다. 보아비스타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국경으로 가야 했다.


※ 마나우스 항구의 선착장. 두 강이 합쳐지는 이곳의 선착장은 아마존 유역의 여러 도시에서 오는 배들의 종착지였다..

※ 선착장에는 비가 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은 마치 바다와 같았다.

※ 마나의수의 옛 영광을 짐작케 하는 오페라하우스(왼쪽). 마나우스의 시가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뒤엉켜 혼잡했다.


  흰 강과 검은 강, 아마존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마나우스.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는 도시인만큼 마나우스는 아마존 밀림 지대의 중심 도시이자 가장 거대한 도시이다. 아마존의 여러 지역 사람들과 온갖 물자들이 모여드는 만큼 활기가 넘치는 다채로운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곳 마나우스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여객선의 종착지였기에 하루쯤 쉬어갈 법했지만 아마존 지대를 빠져나가려면 아직도 버스를 타고 이틀은 가야 했기에 기착지 그 이상의 장소는 아니었다. 마나우스는 한때 아마존의 파리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구가하던 도시라 했다.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번영의 흔적들. 지금은 빛바랜 도시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마존 중심 도시의 위엄은 살아 있었다.


  매끄럽게 뻗은 도로 위를 달리는 브라질 버스의 쾌적함. 편안한 의자와 부드러운 엔진 소리. 버스에서 단잠에 빠져들었던 나는 목적지인 보아비스타의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야 깨어났다. 아침 7시. 12시간을 달려왔지만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버스 회사의 사무실에서는 보아비스타에서 국경 근처의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12시에 출발한다고 했다. 국경 너머까지 나를 데려다 줄 버스는 없다고 했다. 나는 티켓 한 장을 사들고 버스 터미널 주변을 배회했다. 12시까지 라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보아비스타는 아마존 북부 지역의 건조한 지역이었다. 식물들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들에게서 생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메마른 푸르름. 강렬한 태양이 적나라하게 떨어지는 터미널 앞의 공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공터 주변의 풀들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버스터미널 주변에는 흙먼지가 날렸다.

   나는 터미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배낭을 바닥에 뉘어 의자로 삼고 그 위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영화 한 편이 끝나갈 때쯤, 터미널 한쪽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단소 보다는 경쾌한 소리. 리코더 보다는 묵직함이 묻어나는 소리. 소리는 꽉 차 있었다. 결코 거슬리는 소리가 아닌, 오히려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같은 버스를 타고 보아비스타로 온 남자였다. 그는 바닥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는 여러 개의 피리가 꽂혀 있었다. 피리를 불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남자. 연주를 끝낸 남자는 사람들에게 피리를 팔았다. 나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Great!"

  그는 내게 어디에 가냐고 물었고, 나는 베네수엘라로 간다고 했다.  

  

  이름은 루리로. 그도 베네수엘라에 간다고 했다. 아마존 지역의 작은 도시에 사는 그는 벨기에에 있는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방학 중에 고향에 들렀다가 벨기에로 돌아가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카라카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로 간다고 했다. 피리 연주가 일품이었다는 나의 말에 머쓱해하며 그는 피리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소소한 용돈 벌이. 피리를 불며 사람들에게 피리를 팔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피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액세서리들이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았다.

  루리로는 내 젬배를 보더니 연주를 해 달라고 했다. 그의 피리 연주를 들었던 터라 나는 가볍게 젬배를 두드렸다. 단조로운 리듬. 아마존의 배 위에서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던 젬베가 아닌 조용조용 부끄러운 젬배의 울림이었다. 그는 내 옆에서 피리를 불었다.


※ 보아비스타에서 국경마을 파카라이마로 가는 길. 창 밖에 메마른 들판에서 까마귀들이 죽은 동물을 뜯고 있다.
※ 메마른 땅을 지나자 초록색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이 나왔다. 아마존 지대를 벗어난 풍경은 사바나를 연상케했다.

※ 브라질 국경 사무소. 이곳에서 출국 도장을 찍고 베네수엘라 국경 사무소를 향해 걸었다. 베네수알레와 브라질 국경 사무소 사이에는 두 나라의 깃발이 나란히 서서 펄럭이고 있었다.

※ 베네수엘라 국경 사무소. 이곳과 마을 사이의 거리는 약 15km정도 떨어져 있다. 마을로 가기 위해 우리는 히치하이킹을 했다.


  나는 루리로를 따라갔다. 대학교와 고향 집을 오가며 수 차례 국경을 건넜던 그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달린 후에야 도착한 브라질 북쪽의 국경 마을 파카라이마. 그곳에서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었다. 루리로는 내게 걷자고 했다. 마을의 경계에 위치한 브라질 국경 사무소에서 출국 스탬프를 찍었다. 베네수엘라의 국경 사무소는 국경을 훨씬 지난 곳에 있었다. 루리로와 나는 1km 정도 되는 거리를 걸었다.

  루리로는 벨기에의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음악을 즐기는 그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유럽에서 살 것이냐는 나의 물음에 루리로는 아마존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아마존 지대의 작은 도시, 그는 고향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집을 지을 것이라고 했다.


  베네수엘라의 국경 사무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산타 엘레나 데 우아이렌(Santa Elena de Uairen)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다. 국경 주변에는 낮은 산과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루리로는 히치하이킹을 해야 한다며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의 옆에 서서 함께 손을 흔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시리아에서 크락 데 슈발리에에 갔을 때, 하마로 돌아오면서 히치하이킹을 했던 적이 있다. 늦게까지 성에 머물다가 버스가 끊겨 버리는 바람에 히치하이킹을 해야 했고 트럭 한 대를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함께 크락 데 슈발리에에 갔던 그녀는 히치하이킹이 처음이라 했었다. 나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 트럭의 뒤에 올라탄 우리는 마을을 향해 갔다. 내게 있어 이번은 두 번째 히치하이킹이었다.

※ 트럭의 짐칸에 앉아 있는 루리로. 루리로는 언제나 활짝 웃어보였다.

※ 산타 엘레나 데 우아이렌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루리로는 이곳에서도 피리를 불었다.


  트럭 한 대가 멈춰 섰고 우리는 트럭 뒤에 올라탔다. 약간의 덜컹거림. 베네수엘라의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루리로는 맛있는 빵집을 안다며 그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빵과 치즈 그리고 약간의 햄을 샀고 가게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서 끼니를 때웠다. 우리는 시우다드 볼리바르로 가는 버스 티켓을 끊었다. 그곳까지는 10시간이 걸렸고 또 하룻밤을 버스에서 보내야 했다. 아직 카라카스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루리로는 피리를 불었다. 영롱한 피리 소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피리 소리는 요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즐기려면 충분히 즐길 수 있고 함께 즐기려고 할 때는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악기였다. 그에 비해 내가 가진 젬배는 크고 묵직했다. 넓게 트인 공간이 아니고서는 조심스럽게 두드려야 했다. 루리로는 함께 악기를 연주하자고 했지만 선뜻 젬배를 두드릴 수가 없었다. 젬배의 둔탁함이 피리의 아름다운 선율을 망쳐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리로와 나는 시우다드 볼리바르에서 헤어져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 며칠 머물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곳에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카라카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쿠바로 향할 생각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쿠바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루리로에게 작별을 고해야 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헤어짐이었다. 루리로는 또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으며 조심히 가라는 말을 해 주었다. 루리로는 버스터미널 앞에서 피리를 불었고 나도 그의 옆에서 젬배를 두드렸다. 젬배의 둔탁함 속으로 피리의 아름다운 선율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공연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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