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우리에게 주려는 것은

하늘이 진홍빛으로 변하고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때에도

by 임진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삶이다.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결과는 영 시원치 않고 불확실 속에서 아등바등 사는 것이 너무나도 지겹다가도 가끔씩 찾아오는 찰나 같은 작은 행복에 웃음 짓게 되면서 삶은 더욱 아리송해졌다.


그냥 고난이던지 마냥 행복이던지 아니면 행복 중에 한 줌의 고난이던지 하면 좀 더 쉬울지도 모르겠지만 계속 고난이다가 한 줌의 행복, 웃음, 즐거움은 어쩐지 자꾸만 희망을 갖게 되어 뭔가를 더 하게 되고 움직이게 되고 마음 쓰게 되는 것 같다. 근데 그게 너무 짜증 난다.


그러던 중 '진홍빛 하늘 아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독일과 같은 추축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에서도 나치에 저항하는 인물들이 있었고 그중 피노라는 소년은 나치에 부역하는 척하면서 기밀을 빼내고 나치의 감시망을 피해 유대인을 스위스로 도피시켜 주는 일을 했다. 책 '진홍빛 하늘 아래'는 아흔 살에 이른 피노가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얘기를 듣고 한 작가가 쓴 이야기로 꽤 두꺼운 페이지임에도 불구하고 실화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흡입력이 있어 단숨에 읽게 되었다.


피노는 연합군의 첩자로서 나치 장군의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장군의 정부의 가정부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언제 어디서 들킬지 모를 삼엄한 환경에서 결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냈다.


역사가 말해주듯 제2차 세계대전은 추축국의 패망으로 종결되지만 그 사이 나치에 저항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너무 많이 죽었고 전쟁 종결 이후 부역자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피노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다. 단지 가정부였을 뿐인데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처단된 것이다. 동시에 연합군의 첩자였음에도 비밀리에 업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피노 역시 부역자로 몰리며 죽을 위기에 놓인다.


사랑했던 여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신이 마지막에 단죄하리라 생각했던 나치 장군은 미군에 정보를 팔아넘겨 끝내 살아남는 모습을 보면서 피노는 더욱 극심한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장군은 스위스로 안전하게 이동하면서 피노에게 '관찰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데 관찰자는 피노의 암호명으로 피노는 자신이 첩자인 것을 장군이 언제부터 알았는지 평생을 걸쳐 혼란스러워한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한 때 피노는 스스로 목숨을 저버릴 생각도 하지만 신부님을 통해 다시 생각을 바꾸고 다시금 힘을 내고 살아간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흔 살이 된 피노가 그러한 삶을 회상하며 말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엇을 보게 될지, 어떤 중요한 사람이 우리 삶에 나타날지, 어떤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지 절대 알 수 없어. 삶은 변화, 지속적인 변화야. 그 변화 속에서 희극을 발견할 만큼 운이 좋지 않다면, 그 변화는 거의 항상 드라마나 비극이지. 하지만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서도, 하늘이 진홍빛으로 변하고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믿는다네. 우리가 운 좋게도 계속 살아가게 된다면, 아무리 완벽하지 않더라도 매일, 매 순간에 일어나는 기적에 감사해야 해. 그리고 우리는 신과 우주와 더 나은 내일을 믿어야 해. 그 믿음이 항상 보답받지는 못할지라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치로 오해받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전쟁은 끝이 났지만 남은 것은 부역자로 몰리는 자신과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여인 그리고 그토록 증오하던 나치 장군은 처벌도 받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갔고 자신이 어쩌면 그 장군에 의해 목숨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피노는 절망의 끝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살아갔고 견뎌냈고 이겨냈다.


이 책을 보면서 삶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진홍빛으로 변하고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을 때에도 믿고 매 순간 일어나는 기적에 감사해야 하는 것. 앞으로 살아갈 날도 여전히 알 수 없고 막막하겠지만 그럼에도 살아가게 된다면 믿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봄이 제법 제 계절의 형태를 갖추었다. 따뜻한 햇살과 길 가에 핀 꽃들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시기다. 삶은 또 이런 것일지도, 봄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될 수 있는 것. 기적이 될 수 있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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