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에세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2014년 1월, 수능이 끝나고 놀만큼 놀아 더 이상 놀거리가 없었던 나는
급기야 친구와 전시회를 가보기로 하기에 이르렀다.
전시회는 고사하고 박물관도 싫어했던 나는 대체 어느 전시를 보러 가야 할지 몰라서, 친구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일주일 뒤 친구는 나를 부산문화회관에 데려갔다. 당시 예술의 'ㅇ'도 몰랐던 나는(지금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현대미술 전시 따위를 데려갈 줄 알았다. 친구가 데려간 곳은 미술 전시회가 아닌 사진전이었다. 옛날에 어느 잡지사의 간행물에 실렸던 사진들을 전시한 것이라고 했다.
열아홉의 내게 잡지란 베스트일레븐(해외축구), 에스콰이어(남성 패션), 그리고 미용실에 가면 엄마들이 보는 이상한(?) 여성 잡지가 전부였다. 큰 기대 없이 입장한 나는 첫 장부터 옆의 설명과 함께 천천히 한 장씩 감상하기 시작했다. 내 돈을 내고 입장한 첫 번째 전시였기 때문에, 그전에 체험학습 따위로 갔던 전시회와는 달리 나름 신경 써서 감상하려 노력했다. 큰 노력은 필요 없었다. 얼마 못가 사진들에 빠져 정신없이 감상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라이프(LIFE) 사진전'과의 첫 만남이었다.
전 세계에 사진작가를 두고 있던 라이프 지는, 피나는 노력과 약간의 운으로 다수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필름에 담아냈다. 그 '순간'의 비중이 미국이나 유럽에 몰려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백범 김구의 암살 현장을 담은 사진을 봤을 때 그 생각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대 최약소국의 정신적 지도자의 죽음에도 관심을 가졌다니. 이 행성의 모든 가십과 이슈, 역사와 국제 정세가 전부 담겨있는 듯했다.
홀린 듯 구매한 전시회 굿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라이프를 '파기' 시작했다. 깊은 역사를 지녔음에도 인터넷의 도입으로 사진 잡지의 매출이 점점 감소했고, 결국 재정악화로 21세기를 맞이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슬픈 소식. 최근에 발행한 간행물을 보고 싶었던 나는 낙담했다. 그런데 관련된 영화가 하나 있었다. 라이프 지에 대한 영화라고 했다. 개봉한 지도 얼마 안 되어 보였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에 나온 아저씨가 주인공이었다. 그 영화를 재미있게 봤으니까 볼만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영화는 내가 '왓챠(지금의 왓챠피디아)'에서 별점을 매긴 700여 편의 작품 중 당당히 5점을 차지했다. 5점을 준 영화는 지금까지도 스무 편이 안 된다. 그 영화가 바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이다.
라이프 사의 사진 현상 관리직으로 일하는 월터 미티(벤 스틸러 역)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내향적인 성격인 그는 감정을 잘 표출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상상으로 해결한다. 상상 속에서는 뭐든 할 수 있다. 평소라면 꿈도 못 꾸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해 보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의견을 밀어붙이는 상사와 멱살잡이도 가능하다. 왠지 인프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들어온 CEO는 재정 악화인 라이프 지를 인터넷 잡지사로 축소할 것이며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라 예고하고, 그에 따라 월터는 기존의 간행물은 다음번이 마지막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다음번 호의 표지가 라이프의 마지막 표지가 된 상황에서, 마지막 표지가 될 사진의 필름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 월터는 표지를 찍은 사진작가인 숀 오코넬(숀 펜 역)에게 연락을 시도하지만, 세계를 누비며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그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집-회사, 집-회사가 인생의 전부였던 월터는 결국 숀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월터는 그린란드부터 아이슬란드까지 필사적으로 숀을 쫓으나, 비행하는 헬기에 매달려 폭발하는 화산을 찍는 숀을 스치듯 발견할 뿐 결국 그와 대면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며칠이나 회사에 무단결석한 월터는 동료들과 함께 해고당하고, 체념한다. 하지만 우연히 숀의 흔적을 다시 발견하고, 히말라야까지 등반한 끝에 숀과 마주한다. 숀과의 만남 후 뜻밖의 경로로 필름을 손에 넣은 월터는, 비록 잘렸지만 마지막 표지가 담긴 필름에 담긴 사진을 확인하지 않은 채 회사에 제출한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지는 마지막 표지 사진.
월터는 공상에 빠져 사는 약간 이상한 인물이다. 스무 살의 나는 직접 행동하지 않고 현실을 상상으로 대체하는 월터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깟 거 해버리면 되지 왜 저렇게 산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 20대 후반이 된 나는 벌써 월터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그저 평범한 삶이라도 살길 바라는, 사회에 찌든 무기력한 현대인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코로나로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진 이후로는, 다녀온 지 5년이나 지난 해외여행을 아직도 추억하는 나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주위엔 생각보다 월터가 많았다. 꼭 해외여행이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실행이 아닌 상상에서 그치는 횟수가 늘어나는 사람들 말이다.
영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월터는 더 이상 상상을 하지 않는다. 다이내믹한 상황을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젊다. 오늘이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 가장 젊은 날이 아닌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우리의 상상도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저질러야 할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몇 살이든, 뭐든 저질러도 회복할 수 있는 나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