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에세이 #위플래쉬 (2014)
가스라이팅하는 문어를 본 적 있는가. 나는 있다.
보통 성장 영화에서 주인공의 곁에는 언제나 주인공의 멘탈을 케어하는 든든한 친구, 또는 연인이 있다. 여기서는 없다. 이 친구는 꿈을 위해 자기 여친도 버린다. 헤어지자며 온갖 심한 말은 다 퍼부어놓고선 그런 말을 한 자신에게 화가 나 그 스트레스를 또 연습으로 푼다. 진정 한 가지 분야에 미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얘도 원래 이랬던 건 아니다. 주인공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있다. 영화 개봉 후 인터넷에서는 한동안 그를 문어라고 불렀다. 그 문어에 대한 이야기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2021)이 개봉했다. 나는 두 번 봤다. 어딘가에서 "벼락치기로는 절대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라는 코멘트를 보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말이었다. 내가 20년간 봐왔던 아아 더 이상은 쓰면 안 되겠다. 아직 극장에 걸려 있으니 아직 못 보셨다면 꼭 보시길. (2022년 1월 기준)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한 배우에게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바로 데일리 뷰글의 편집장 J.조나 제임슨(J.K 시몬스)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민머리에 가까워진 그는 유독 과거의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영화를 두 번 보고 나오는 길에서야 생각났다. 그가 바로 <위플래쉬>의 테렌스 플레쳐였다는 것을.
이 게시물은 영화 <위플래쉬>(2014)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대학교인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한 앤드류 네이먼(마일즈 텔러)은 학교 밴드에서 별 볼일 없는 보조 드러머다. 연습에는 열심히지만, 교우관계도 별로 좋지 않고, 실력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학교의 모든 연주자는 한 선생이 나타나면 유독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그 선생은 학교 내 최고의 실력자만 골라 본인의 밴드 멤버로 영입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영입되어 그 밴드에서 활동하면 교내 최고의 연주자라는 명예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 선생의 이름은 테렌스 플레쳐(J.K 시몬스)이다. 네이먼은 우연히 플레쳐의 눈에 들어 매인 드러머를 제치고 그의 밴드에 들어간다.
밴드는 쉽지 않다. 이유는 옆의 잘난 동료들 때문이 아니다. 바로 그를 영입한 플레쳐 교수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조용히 다가와 남의 말은 신경 쓰지 말라며 다정한 조언까지 해주지만, 정작 네이먼이 박자를 틀리자 온갖 폭언과 욕설, 패드립으로 그를 모욕한다. 반박할 생각조차 안 드는 카리스마를 장착한 채,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언어폭력을 마구 휘두른다.
그가 한바탕 욕설을 내뱉을 때면 울면서 밴드에서 뛰쳐나간 여느 연주자들과는 다르게, 네이먼은 눈물은 흘려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방음실에 틀어박혀 플레쳐의 말도 안 되게 까다로운 박자를 맞추기 위해 말 그대로 '피가 날 때까지' 연습에 매진한다. 응원은 하지만 내심 불안해하는 아버지와, 음악 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친척들에게 오래 시달린듯한 그였기에, 플레쳐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하면 끝이라는 생각이 든 듯하다. 여자 친구를 매정하게 차 버리는 것도 이 시점이다. 혹독한 연습 끝에, 네이먼은 메인 드러머로 더넬런 밴드 경연에 참가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부터 네이먼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광기가 보인다.
경연 날,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난 네이먼은 피를 흘리며 무대에 오르고, 차에 치인 후유증으로 무대를 망친다. 무대에 오른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네이먼은 플레쳐가 책임을 물으며 자신을 밴드에서 나가라고 하자, 갑자기 엄청나게 분노하며 그를 덮치고, 그 일로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그리고 한 변호사가 그를 찾아온다. 변호사는 플레쳐가 그 전에도 정신적 폭력으로 학생을 죽게 만든 적 있으며, 네이먼에게 플레쳐의 정신적 가해 여부를 물으며 익명의 증언을 요구한다. 플레쳐는 그 일로 학교에서 해고당한다.
몇 달 뒤, 학교 밖에서 우연히 만난 네이먼과 플레쳐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네이먼은 어느새 플레쳐와 닮아있다. 플레쳐는 자신이 학교에서 하려던 건 지휘가 아니라, 학생들의 한계를 넘기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소름 돋는 사실은, 나는 이 장면을 볼 때 어느 정도 플레쳐에게 감화되었다는 것이다. 가끔 악당은 사연 없이 행위의 동기만으로 관객을 이해시키기도 한다. 관객은 그런 자신을 보며 혼란에 빠진다. 어쩌면 자신도 악당인 걸까. 하지만 인간에겐 여러 마음이 혼재할 뿐, 어떤 것이 자신이라고, 어떤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다.)
네이먼은 플레쳐의 권유로 그의 프로 밴드에 들어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하는데, 그마저도 플레쳐의 계략이다. 플레쳐는 네이먼이 모르는 곡을 첫곡으로 선곡한다. 큰 무대에서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게 함으로써 뮤지션 생명을 아예 끊으려던 것이다. 당황한 네이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결국 그 곡이 끝나자마자 무대를 걸어 나온다. 그런데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걸어 들어가서, 멋대로 아는 곡을 연주하며 밴드를 리드한다.
그런데 문어가, 아니 플레쳐가 웃는다. 처음으로 웃는다. 흡족한 표정이다. 자신의 언어폭력과 가스라이팅을 스스로 극복한 제자를 처음 본 것이다. 네이먼의 환상적인 드럼 솔로와 함께 연주는 이어진다. 클라이맥스에서, 네이먼과 플레쳐 두 사람은 '완벽한 음악'이라는 유일한 공통의 목적을 서로 이해한 듯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가스라이팅은 쉽게 말해 '정신 개조'다.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를 종용하여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틀렸다고 믿게 만드는 것. '설득'과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네이먼은 플레쳐식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최대 수혜자 기도 하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엄연한 폭력이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한들 그것은 수만 가지 중 하나의 운 좋은 사례일 것이며, 가스라이팅하는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은 그 사람의 행위가 가스라이팅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지적하며 돌파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비단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가스라이팅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게 하거나, 업적을 이뤄내는 일이 자주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옳은 방식이었던 걸까? 위대한 결과를 위한 가학적인 과정은 용인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스라이팅은 사라져야 한다. 때로는 가해자와 피해자 둘 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피해자만이라도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당당히 말했으면 좋겠다. 이제 그쯤 하시죠,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