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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04. 2020

하루가 별거지|체에 걸린 것들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일상을 말하는 에세이는 쉽고도 어렵다. 

오늘 새벽만 해도 그렇다. 

초침은 하염없이 나를 찌르는데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하얀 종이에는 볼펜의 딸가닥 소리만 쌓였다. 

그냥 있는 그대로 쓰면 되는데 어떤 건더기도 낚이지 않는다. 

기억의 체에 걸리는 게 없을 정도로 평범한 삶이 흐른 것이다.





그에 비해 소설은 상상이 현실로 수월하게 바뀐다. 

덩어리마다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소설 속 삶은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자극적인 요리와도 같다. 

하나같이 시고 맵고 달고 짠 글자가 나의 표정을 반죽해버린다. 

문자가 예외 없이 다음 장면을 위한 방아쇠가 된다. 

액션을 외치면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매력적인 대사를 읊는다. 

나는 그저 받아쓰면 끝이다.





하지만 에세이 속 삶은 다르다. 

소설보다 담백하고 삼삼하다. 

깊은 삶에 녹은 육수 한 그릇에 숭덩숭덩 썬 의미를 말아 넣은 국수와도 같다. 

먹을수록 배가 따듯하고 든든하다. 

후루룩 들이켜도 모두 소화된다.





그렇다면 소설과 에세이는 다른 별 이야기일까? 

생각할수록 같은 별에 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 자체가 소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느린 전개와 다음 장면의 방아쇠를 알 수 없는 점이 차이점이지만 글이 모이면 대단히 두꺼운 장편소설이 된다. 

5cm 거리를 두고 치일뻔한 신호 위반차와의 액션, 밤 12시 공중전화에서 보았던 귀신과의 호러, 개인적으로만 구구절절한 로맨스, 기약이 없이 떠났던 취업 어드벤처, 일요일인데 월요일로 착각하고 30분 넘게 출근했던 코미디까지 다 있다. 

무엇보다 모든 게 실화를 기반으로 하니 이보다 훌륭한 소설은 없다. 





나름 매듭지으니 아까보다 심보가 가볍다. 

이 정도 마음이면 펜 정도는 띄워서 스스로 쓰게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나의 역사에는 SF소설이 많이 물들었나 보다. 

맙소사! 벌써 아침이다. 

여태 하얀 종이에 점만 찍고 첫 글밥을 쓰지 못했다. 

눈을 비비는 5살 깜냥 스승에게 물었다.

“에세이가 뭐야?”

“에세? 그거 진짜 마싯떠!”

깜냥이의 ‘다 안다’ 허세병은 둘째치고 아이 말대로 에세이가 맛있긴 하다. 

쓸 때도 읽을 때도 맛있다.





어떻게 하면 맛있게 쓸 수 있을까? 

맹목적인 삶에 빠지지 않으면 된다. 

盲目. 

뜻 그대로 주관과 원칙의 눈을 가리고 흐르는 대로 사는 삶을 말한다. 

그 안에서 쓴 글은 재미가 없고 나를 바꾸지도 못한다. 

<하버드 행동력 수업>을 보면 맹목적인 집단의식에 물들면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기 쉽다고 한다. 

따라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의식. 

나한테 이게 필요했다. 

드디어 난 맹목을 떨치고 무수히 점이 찍힌 종이에 글을 쓸 수 있다. 

오랜만에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언제 쓰지?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내일의 나에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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