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일상을 말하는 에세이는 쉽고도 어렵다.
오늘 새벽만 해도 그렇다.
초침은 하염없이 나를 찌르는데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하얀 종이에는 볼펜의 딸가닥 소리만 쌓였다.
그냥 있는 그대로 쓰면 되는데 어떤 건더기도 낚이지 않는다.
기억의 체에 걸리는 게 없을 정도로 평범한 삶이 흐른 것이다.
그에 비해 소설은 상상이 현실로 수월하게 바뀐다.
덩어리마다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소설 속 삶은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자극적인 요리와도 같다.
하나같이 시고 맵고 달고 짠 글자가 나의 표정을 반죽해버린다.
문자가 예외 없이 다음 장면을 위한 방아쇠가 된다.
액션을 외치면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매력적인 대사를 읊는다.
나는 그저 받아쓰면 끝이다.
하지만 에세이 속 삶은 다르다.
소설보다 담백하고 삼삼하다.
깊은 삶에 녹은 육수 한 그릇에 숭덩숭덩 썬 의미를 말아 넣은 국수와도 같다.
먹을수록 배가 따듯하고 든든하다.
후루룩 들이켜도 모두 소화된다.
그렇다면 소설과 에세이는 다른 별 이야기일까?
생각할수록 같은 별에 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 자체가 소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느린 전개와 다음 장면의 방아쇠를 알 수 없는 점이 차이점이지만 글이 모이면 대단히 두꺼운 장편소설이 된다.
5cm 거리를 두고 치일뻔한 신호 위반차와의 액션, 밤 12시 공중전화에서 보았던 귀신과의 호러, 개인적으로만 구구절절한 로맨스, 기약이 없이 떠났던 취업 어드벤처, 일요일인데 월요일로 착각하고 30분 넘게 출근했던 코미디까지 다 있다.
무엇보다 모든 게 실화를 기반으로 하니 이보다 훌륭한 소설은 없다.
나름 매듭지으니 아까보다 심보가 가볍다.
이 정도 마음이면 펜 정도는 띄워서 스스로 쓰게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나의 역사에는 SF소설이 많이 물들었나 보다.
맙소사! 벌써 아침이다.
여태 하얀 종이에 점만 찍고 첫 글밥을 쓰지 못했다.
눈을 비비는 5살 깜냥 스승에게 물었다.
“에세이가 뭐야?”
“에세? 그거 진짜 마싯떠!”
깜냥이의 ‘다 안다’ 허세병은 둘째치고 아이 말대로 에세이가 맛있긴 하다.
쓸 때도 읽을 때도 맛있다.
어떻게 하면 맛있게 쓸 수 있을까?
맹목적인 삶에 빠지지 않으면 된다.
盲目.
뜻 그대로 주관과 원칙의 눈을 가리고 흐르는 대로 사는 삶을 말한다.
그 안에서 쓴 글은 재미가 없고 나를 바꾸지도 못한다.
<하버드 행동력 수업>을 보면 맹목적인 집단의식에 물들면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기 쉽다고 한다.
따라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의식.
나한테 이게 필요했다.
드디어 난 맹목을 떨치고 무수히 점이 찍힌 종이에 글을 쓸 수 있다.
오랜만에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언제 쓰지?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내일의 나에게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