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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06. 2020

하루가 별거지|영화에서 사랑을 뺐더니

카우보이식 해결법






“나를 죽인 사람과 배신한 사람에게 복수할 거야!”

<사랑과 영혼>이라는 고전 영화를 냄비에 넣고 뿌글뿌글 끓이면 사랑은 수증기로 사라지고 위와 같은 글자만 남는다. 

아름다운 영화지만 뮤지컬 <고스트>로도 보니 다른 심보를 갖고 싶어 졌다.

일단 밀도가 다른 사랑과 복수를 증류로 나누었더니 ‘사랑으로 위장한 카우보이 이야기’로 칭할 수 있었다. 

영혼이 된 주인공은 권총 대신 현세의 물건을 만지는 힘으로 복수하고 만다. 




카우보이는 정의를 위해 총을 쏠 줄 아는 거친 서부 남자의 이미지를 가졌지만, 사실 소몰이꾼이었다. 

게다가 옛날 카우보이는 백인 남성이 아니다. 

대부분 멕시코 이민자 출신의 히스패닉 계열이었다. 

소를 배달하는 택배원이 도둑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또는 사나운 동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고 다닌 것이다. 

카우보이라는 이미지에 김이 빠지지만, 잘 포장해서 활용하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주인공은 카우보이식 해결법으로 끝을 본다. 





“나는 정의고 선이니 괴롭히면 널 용서하지 않겠다.” 

미국식 영웅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하얀 편과 검은 편 가르기 방식이다. 

물론 내가 피해자 입장이 되면 누구보다도 카우보이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못내 아쉽다. 

권선징악이 전 세계의 문화라지만 카우보이의 정의는 그것과 다르다. 

자신이 선이라고 단정 짓는 교만함이 자기 합리화를 낳기 때문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은 작게 왜곡하고 내 편이 아니면 잠재적인 적으로 본다. 

이런 세계관은 유아에게서 많이 봤고 뉴스에서는 더 많이 봤다.





영화 <콘스탄틴>을 보면 악과 싸우는 주인공이 나온다. 

역시나 카우보이 영화지만 마지막 장면은 조금 다르다. 

신을 믿고 앞장서서 악을 물리쳤지만, 곧 지옥을 가야 한다. 

그는 천국을 약속받지 못해서 분노한다. 

내게는 카우보이식 해결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로 느껴졌다. 

결국, 주인공은 자기희생을 통해 천국의 문을 열고야 만다. 

유아가 못 보는 15세 관람가라서 아쉽다. 

그럼 자기희생은 15세 이후에 배워야 하나.





문득 잔잔하던 내면에 물수제비처럼 질문이 튀어나온다.

“이봐. 카우보이식 해결법과 갱스터식 해결법은 차이가 없는 거야?”

내 편과 네 편이 있고 나를 괴롭히는 상대에게 무자비한 결과를 주는 걸 보면 비슷하지만 또렷한 차이가 있다.

카우보이는 스스로 선이라고 칭하지만 갱스터는 감히 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를 몰던 카우보이는 관심 영역이 넓다. 

야생하는 소의 풀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 버릇 때문에 간접적인 일에도 끼어든다. 

하지만 갱스터는 철저히 직접적인 이익과 손해만 신경 쓴다. 

자신의 지역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카우보이는 드러난 범죄에 대해서 강하게 처벌한다. 

피해자 중심으로 살핀다. 

실제로 미국법을 보면 가혹하게 죄를 묻는다. 

갱스터는 가해자 중심으로 판단한다. 

가해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나중에 자신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퇴근길에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 

아파트로 들어가려면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차선이 하나밖에 없어서 짧은 거리임에도 많이 밀렸다. 

직진 차들은 초록 불이 되어도 좌회전해야 하는 앞차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앞의 좌회전 차들이 모두 빠져야 직진도 가능한 불편한 길이었다. 

나는 밀리는 뒤차 생각에 중앙선을 살짝 넘어서 비어있던 좌회전 도로에 섰다. 

보통 그렇게 했고 나 역시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범칙금 딱지가 날아왔다. 

알고 보니 뒤차가 블랙박스로 신고한 거였다. 

사실 할 말이 없지만 내 마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뒤차가 야속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서에 가서 짧게 하소연을 했다. 

그럼 법정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깨끗이 포기했다. 





“위반했습니까?”라고 묻고 “예, 아니요”로 말하게 하면 답은 너무나 분명했다. 

내 편인 줄 알았던 운전자들에 대한 배신감이 퍼졌다. 

“내 시간과 돈을 쓰게 했으니 이제부터 교통위반은 용서 못 해!”

카우보이가 나에게 빙의했다. 

실제로 블랙박스를 이용해서 여러 건의 위반 영상을 노트북 바탕화면에 두었다. 

마치 언제든 쏠 수 있는 권총의 회전 탄창을 돌리는 것처럼 며칠째 묵혔다가 지워버렸다. 

심한 행동이 아니었고 “나처럼 무슨 사정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차마 신호할 수 없었다. 

그냥 메마른 나나 똑바로 살자고 다짐했다. 

그랬더니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매처럼 찢어진 내 눈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뒤에서 깜냥이가 헬로 카봇 이야기를 또 해달란다. 

나는 카우보이보다 그냥 아이 수준에 맞는 보이를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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