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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Nov 10. 2020

하루가 별거지|진짜 즐겨봐

늦가을이 주는 가르침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서 여행 갈 마음을 한입에 먹었다. 

가을을 느끼려면 ‘다짐+시간’이 있어야 하는 현실이 조금 서글펐지만, 그래도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곡교천 은행나무길은 노란 구름이 떠있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가을을 좋아하는 나는 이럴 때 ‘팔랑비’가 내린다고 말한다. 

팔랑비는 바람과 함께 가을을 촉촉하게 적셨다. 

관광객을 보니 저마다 주인공이 된 얼굴로 노란 비단길의 중심을 거닐었다. 





그런데 깜냥이는 마음이 다른 곳에 갔다. 

구석에 있는 허름한 오락기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잠시 나오는 게임 영상에 총을 흔들며 다리를 동동 구른다. 

동전을 넣지 않았지만, 지구를 구할 기세로 진지하다. 

이 멋진 풍경을 두고 자극적인 영상에 현혹되다니. 

은행나무가 서운한지 가지를 마구 흔든다. 

그러고 보면 나도 자연이 아름다운지 잘 몰랐었다. 

나이를 많이 퍼먹으면서 꽃이나 나무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 왜 가치 있는 것을 늦게 아는 걸까? 

자연은 영원한 삶이라는 전제하에 짧은 변화를 주제로 산다. 

찬란한 순간을 보여주다가 덧없이 사라지니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을 통해 우리는 정해진 때를 깨닫는다. 

또한, 자연이 죽음과도 맞닿았다는 걸 본능으로 느낀다. 

영원히 살 것 같은 어린 눈에게 자연은 그저 늘 보는 배경일뿐이다.





깜냥이를 살살 달래서 은행나무길의 주인공이 되어보았다. 

곡교천 주변은 두 가지 느낌이 대비된다. 

노란 길과 초록 길. 노란 길은 매혹적이고 화려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은행잎이 살랑살랑 흔들며 떠난다. 

반면에 초록 길은 수수하고 소탈하다. 

늘 같은 오늘이라며 파릇파릇한 잔디가 바람결대로 가르마를 탄다. 

겨울을 준비하는 다른 모습에 자꾸 은행나무 길과 곡교천 길을 번갈아 보게 된다.

반대편을 보니 깜냥이가 뿔이 났다. 

“걷는데 왜 자꾸 같은 길이야. 재미없어.”





심심해하는 아이를 위해 은행잎 뿌리기 놀이를 알려주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깜냥이는 은행잎을 잔뜩 모아서 내게 뿌리기 시작했다. 

아내의 지적도 소용없다. 

자기 머리보다 더 풍성한 은행잎을 들고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달려온다. 

평소에도 이렇게 아빠를 찾았으면 좋겠건만 아이는 아직도 엄마 껌딱지이다. 

깊은 관심을 황송해하며 바람 따라 도망을 다녔다. 

아이 눈을 보니 이미 잠에 많이 취한 상태이다. 

이제는 아이도 자연이 되었으니 큰일이다. 

이미 머리카락 사이로 노란 물이 들었지만, 아이에게 마감은 없다. 

아이는 내가 요리조리 피하는 게 얄미웠는지 빠르고 정확한 명중률을 자랑하는 조약돌을 잎 사이로 넣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밑장 넣기! 

나는 이때다 싶어서 돌은 위험한 거라고 훈계를 늘어놓으며 놀이를 끝냈다. 





돌아오는 길에도 나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내년에도 이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순간 입을 막았다. 

작년에도 나는 그 말을 했었다. 

우리의 삶이 오늘에 묶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오늘이란 1년을 기다려온 과거의 오늘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루살이 인생이 아니라 계절인생이었다. 

내년의 오늘을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가을은





여러 개여도


하나여도


아름답다





멀어도


가까워도


보고 싶다





닿아도


헤어져도


생각난다





담아도


흘려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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