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 아이가 스승입니다.
아이는 얼굴이 자주 바뀐다.
깜냥이와 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다섯 살 아이 얼굴에 한 살 때 모습이 보인다.
이럴 때마다 아내는 "오늘은 왜 이렇게 아기아기 하냐"는 말을 종종 한다.
무심코 지나친 시간이 잠시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아기였다는 단서가 사라질 때마다 아쉬웠는데 다시 돌아온 아기가 반가웠다.
노곤한 깜냥이는 우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트에 누웠다.
아내는 한 살 때 아기를 안았던 것처럼 품에 안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이가 배시시 웃는다.
시간은 이럴 때 멎는다.
아내는 옛날 깜냥이가 생각났나 보다.
“깜냥아, 응애라고 해 봐”
“응애~”
아이는 엄마 기분을 맞추고 싶었는지 “응애”라고 외치며 우는 시늉을 했다.
저건 세속적인 응애이다.
다섯 살 아이는 이제 응애를 우는 걸로 알고 있다.
“응애라면 우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깜냥아 넌 그렇게 웃었단다.”
말도 못하고 응애만 할 줄 알았던 우리는 웃을 때도 울 때도 응애를 외쳤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응애는 그저 울 때만 내는 소리라고 안다.
아마 아기는 울음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고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응애뿐이니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기는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웃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응애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함께한 말인데 한쪽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쉬웠다.
깜냥 스승은 이걸 내게 알려주려고 우는 시늉을 했나 보다.
아! 역시 스승님.
옛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면 오경필 중사(송강호)가 자주 했던 휘파람 소리가 생각났다.
일정한 소리를 길게 내뿜으면 난 그냥 좋았다.
그래서 휘~ 소리를 자주 따라냈다.
휘파람이 습관이 되자 나는 오경필 중사 마음에 있는 JSA 초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휘파람을 부를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대신해서 휘파람을 분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고 복잡할 때 나오는 소리이다.
한숨은 땅으로 꺼지지만, 휘파람은 연착륙을 도와 슬픔을 한결 가볍게 했다.
세속적인 휘파람은 기쁠 때 내지만 내게는 슬플 때도 내는 한숨이다.
그러고 보니 응애와 참 비슷하다.
스승님, 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늘 할 수 있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이 응답이라도 하듯이 벌떡 일어난 깜냥이가 응애 소리를 내며 내게 몸을 던졌다.
몸싸움 덕분에 이불 먼지가 쌓일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