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 아이가 스승입니다.
달릴 줄 알게 된 아이는 걷기보단 뛴다.
엔진은 세 살부터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식지 않는다.
어린 날의 상징이기도 하다.
집이든 학교든 아이들을 보면 ‘걸어 다니라’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뛰는 건 아이라면 당연히 갖는 본능인데도 잔소리가 는다.
그나마 올해는 코로나 19로 마스크를 끼면서 아이들 엔진이 시들해졌다.
엔진이 강제로 멈춰진 현실이 마냥 애처롭기만 하다.
깜냥이는 세 살부터 뛰었다.
그날도 그랬다.
외출을 다녀온 모자母子는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현관과 연결된 집안이 육상 경기장처럼 보였나 보다.
아내가 신발을 벗는 신호음에 맞춰 깜냥이는 내달렸다.
꺼지지 않는 엔진이 힘차게 움직였다.
깜짝 놀란 아내는 잽싸게 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력 질주하는 아이는 앞만 보고 계속 달렸다.
신발 자국은 복도와 거실에 아름다운 선을 그렸다.
아내도 뒤늦게 시동을 걸었지만 세 살 아이는 잡히지 않았다.
세 살과 삼십 대의 엔진 대결.
경주용 자동차 엔진의 경쾌한 소리가 거실을 가로지른다.
하지만 구형 경운기 엔진은 레버를 끼우고 휠을 돌려야 한다.
레버를 찾는 아내는 다급하다.
눈앞 아이가 점점 손에서 멀어진다.
진심으로 뛰는데도 발동이 늦게 걸린 다리는 야속하기만 하다.
깜냥이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침실의 범퍼 침대까지 도착했다.
쉬지 못한 아이 다리는 마지막 연료를 불태운다.
“안 돼”를 외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아이는 멋지게 하늘을 날았다.
아내도 마지막 스퍼트와 함께 팔을 뻗지만 미끄러지고 만다.
둘은 그렇게 몸을 날렸다.
깜냥이는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갔고 아내는 문에 머리를 박았다.
모자가 모두 터치다운.
아내는 화나면서 어이없고 웃기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 대상감이다.
엄마의 대상을 축하하는 아이 웃음은 침대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임을 다시금 입증한다.
불타는 엔진은 어른이 되면서 점점 온도를 빼앗긴다.
그리고 삶과 맞닿아 딱 그만큼만 움직일 수 있게 적응한다.
세상에 길든 엔진은 연비가 좋지만 그것뿐이다.
떨리는 엔진 소리는 그곳에 없다.
불행히도 떨리지 않으면 삶의 여행도 없다.
그리고 여행이 없다면 나를 위한 질주도 불가능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숨이 차오르게 달렸던가?
연말은 늘 나에게 그렇게 묻고 달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