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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Apr 08. 2021

반가운 손님

산책뒤끝記

빗방울이 도닥도닥 땅에 떨어진다. 



비가 그리워서 가볍게 산책을 떠났다. 

건조했던 바닥의 낯이 하나둘 진한 색을 입는다. 

땅과 충분히 교감한 봄비가 이번에는 힘껏 다른 세상을 만든다. 

제법 쏟아진다. 

내릴 시기를 아는 좋은 비다. 

좋은 비는 그 내릴 시절을 알고 있나니 
봄이 되면 내려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구나

-두보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일부

나무와 풀의 초록빛은 선명해졌다. 

초록색.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지만 지나치면 안 될 색이다. 

봄비가 덧칠해준 덕분에 진한 초록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정여주 작가의 <미술치료의 이해>라는 책을 보면 색이 가진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초록색은 자연의 기본색, 봄, 조화, 희망, 평화, 지속성, 자신감, 자아존중 등을 상징한다. 

동시에 미성숙도 포함한다. 

처음에는 나쁜 의미로 느껴졌지만, 지금은 성장 가능성, 무한한 잠재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초록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책에는 성실하고 겸손하고 자기 통제력이 뛰어나고 참을성이 강하고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유형의 사람이 초록색을 좋아한다고 나와 있다. 

사회성은 좋지만 고요한 삶을 선호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교사가 많다는 말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나치게 색에 집착하는 사람은 우울과 불안이 있는 걸로 해석하기도 한다. 

좋은 해석만 다시 되새기며 공원을 돌았다. 

충분히 초록색을 들이마셨고 흙 향기에 취했다. 

기분 좋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봄비는 점점 더 굵어진다.

주차장까지 왔건만 차 안의 빗소리는 자꾸 나를 유혹한다.

퉁퉁퉁 울리는 소리가 마치 태아 때 느꼈던 엄마의 심장 소리처럼 느껴졌다.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고 말았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낮잠이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이번에는 노을 산책을 누볐다. 

비는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걸을 때마다 싸악 싸악 땅을 긁는 발소리가 났다. 

마른땅을 걸을 때와 또 다르다. 

촉촉한 땅은 소리를 낼 줄 안다. 

마음이 충분히 젖으면 글이 써지는 것과 비슷하다. 

언제 비가 내릴지, 언제 마음이 젖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러고 보니 땅과 나는 닮았다. 

하늘을 좋아하고 세월이 흐르면 길이 나기도 하고 칸막이를 하면 좁아지기도 하고 꿈처럼 높은 산도 있고 심술이 나면 흔들기도 하고…. 

정말 닮았다. 





크고 작은 웅덩이는 빗물이 가득 담고 있다. 

웅덩이를 보자 올해 아이와 즐겼던 첫 봄비가 생각난다. 

우산, 우비, 장화와 함께 한껏 들뜬 아이가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봄비를 맞았다. 

우산이 물을 품으면 신 나게 돌리기도 했다. 

그러다 찾은 웅덩이. 

아이는 유심히 살피더니 나뭇가지를 낚싯대 삼아 세월을 낚았다. 

귀여운 모습을 찍는 순간 장화가 하늘을 날았다. 

순간 숨겨진 날개가 보였다.

짧은 날갯짓과 함께 잔잔했던 웅덩이가 크게 요동쳤다. 

첨벙! 

걸쭉한 흙탕물이 내 머리와 얼굴을 정성스럽게 씻어주었다. 

땅에서도 봄비가 내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충만充滿




땅에 높낮이가 있다는 건 


감사할 일 이외다


높으면 하늘이 가득 메우고


낮으면 봄비가 빈 곳을 담근다지


넘치지 않게 채우는 솜씨 좀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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