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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Mar 18. 2021

새벽 풍경

산책뒤끝記

머리가 물을 머금은 스펀지 같다. 



새벽에 장시간 글을 쓰다 보면 머리가 무겁고 축축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자아가 나를 깨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준비해둔 운동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다. 

마스크까지 차면 완벽히 다른 내가 된다. 

하긴 보통의 내가 이른 산책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아파트 단지에서 가끔 출근하는 사람을 본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는 나와 반대 방향으로 사라진다. 

종종 경험하면서도 매번 낯설다. 

작은 공원길-개인적으로 맛보기 공원이라고 부른다.-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가볍게 뛰면 흠뻑 젖은 머리가 탈탈 털리는 기분이다. 

곧 나도, 경치도 잊게 된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오늘은 어떤 생각이 나를 즐겁게 할까. 

애써 신호등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쳐다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탓에 일부러 공원 쪽 나무를 쳐다봤다. 

마지막 남은 치약을 짜듯이 영감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대체로 여기서는 얻는 게 없다. 

앞으로는 신호등과 눈싸움이라도 해야겠다. 

초록 불 신호가 나를 다시 달리게 한다. 

생태공원의 입구에 들어서면 별이 땅에 깔린 것처럼 가로등이 반짝인다. 

늘 보던 모습이지만 매번 멈추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어둠 속 어딘가에서 나의 별도 빛나고 있으리라. 

내리막길을 천천히 걷다가 최근에 자주 보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몇 번이고 오르막길만 오르는 할머니는 오늘도 자기 일과를 소화하고 있었다.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나도 길을 떠났다.







갈대와 억새가 겨울을 이겨내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느다란 줄기가 생각보다 질기고 가벼워서 매서운 계절을 이겼는지도 모른다. 

봄에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삶의 숙제를 풀어낸 승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그러운 나무가 양보해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걸린다. 

난 기분 좋게 두고 걷는다.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혹시라도 나무 덕분에 뒤엉킨 글의 실마리라도 찾을 때면 오두방정을 떨며 침묵의 세리머니를 펼친다. 

오직 자연만이 관객이다. 

바삐 수첩을 꺼내 글을 쓴다. 

매끄럽게 써지는 것만으로도 봄이다. 

겨울에는 볼펜이 잘 나오지 않아 꽁꽁 언 휴대폰을 달래며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봄이라는 증거가 가득하다.





잡생각이 찾아왔다. 

다시 뛸 시간이다. 

일곱 번째 가로등까지 힘껏 달렸다. 

금세 마스크는 축축해진다. 

숨을 내쉴 때마다 고개가 저절로 하늘을 향한다. 

집과 직장만 오갈 때는 막힌 벽이나 컴퓨터만 보게 되는데 공원에 오니 눈이 시원하다.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편에 구겨진 마음 상자가 빳빳하게 펴진다. 

귀를 간지럽히는 바람과 은은한 향기를 뽐내는 풀과 보기만 해도 포근해 보이는 흙과 하늘을 품는 나무와 한 번에 담을 수 없는 자연을 바라보는 내가 조화를 이룬다. 

액자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예술은 발을 움직일 때 가능한 일이다. 

질리지 않는 자연의 매력을 한 수만 배울 순 없을까.





어느새 붉은 지평선이 보인다. 

이제 바라보던 하늘을 등진 채 돌아갈 시간이다. 

철새가 아직 남아있는 논 옆으로 향했다. 

철새의 먹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논은 휑하니 비었지만 따사로운 느낌이다. 

이곳은 겨우내 새들의 집이었다. 

일찍 일어난 철새 몇 마리가 저마다의 울음을 터뜨린다. 

봄인데 언제 돌아가려고 늦장인지 모르겠다. 

혹시 모를 따끈한 새똥을 밟을까 정신을 번쩍 차렸다. 

재차 뛰면 앙증맞은 나무다리가 나온다. 

그곳에는 서리가 뾰로통하게 앉아 나를 기다린다. 

그 덕분에 꽤 미끄럽다. 

첫 번째 발자국을 허락하기 싫은가 보다.





서리를 지나면 할머니가 올랐던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입에 붙은 군가를 한 소절 중얼거리며 전속력으로 달린다. 

그래도 지금은 웃으며 부를 수 있다. 

새로운 내가 횡단보도 앞에 서면 마지막 의식을 준비한다. 

바로 원더우먼 자세다.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양손을 허리에 대며 어깨를 편다. 

신호 대기 중인 차가 있으면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소심한 원더우먼 자세를 하지만 그래도 한다. 

초록 불이다. 

이제 출근 아니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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