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나의 반쪽이다.
아내와 나를 보고 있노라면 반반 치킨이 떠오른다. 같은 닭으로 튀겼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마치 기질은 같은데 겪어보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나와 아내는 내향적이지만 그녀는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지낸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도 당당하게 말한다. 윗사람을 보면 얼음이 되고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며 조심히 말하는 나와 다르다. 덕분에 아내에게 늘 배운다. 여성관도 뚜렷해서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도 종종 듣는 편이다. 어떤 점에서는 티격태격하지만 그래도 아내의 말이 9할 이상 옳다고 믿는다. 세 명의 여성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그랬던가?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비게이션. 그중 하나가 나의 반쪽이다.
아내는 집안 통역사다.
집안 분위기는 아이의 웃음과 울음으로 결정된다. 원인은 아이와 내가 되는 일이 많다. 아이가 떼쓰거나 짜증 내는 일이 늘어날수록 나도 사건 현장의 주범이 되곤 한다.
“깜냥아, 간식 그만 먹자!”
“아까 이거 먹어도 된다고 약속했어.”
“대신 다른 간식을 먹었잖아. 오늘 많이 먹었어.”
“이건 아직 안 먹었어!”
깜냥이는 좋은 뜻-꼭꼭 감춰져서 부모만 알고 있는-으로 하는 말을 잔소리나 자기를 싫어하는 말로 받아들인다. 그때마다 아내가 통역사로 나선다. 아이를 꼭 안아주며 “아빠 말은 이러이러하다는 뜻이야.”라며 해석해준다. 내가 앞 뒷말을 다 자르고 지시적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성인과 대화를 나눌 때는 그러지 않는데 아이와 있으면 명령어를 쓰는 편이다. 학생을 가르치면서 지시하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요즘은 말이 나오면 입속에서 말의 고삐를 움켜잡았다가 뱉어도 되는지 생각하고 말한다. 아니다. 말하려고 노력만 한다. 아이의 감정을 먼저 공감해주고 질문 형태로 부드럽게 시작하는 게 쉽지 않다. 싫다면서도 결국 잘 따라주는 아이와 통역을 잘해주는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아이 통역 자격증 1급을 따는 그날까지 배우고 싶다.
아내는 감정 해설사다.
로봇처럼 겉으로 표현할 줄 모르는 나와 달리 아내는 말로 감정을 푼다. 직장에서 힘든 일이 생기면 말이 많아진다. 어떤 날에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내의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 난 아직 신발도 못 벗었는데 말이다. 알다시피 남자는 안테나가 하나여서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기 힘들다. 손을 씻으러 가자 아내가 쪼르르 쫓아와 계속 이야기한다. 옷장에 가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내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말의 높낮이를 섞어가며 공감과 호응을 하는 편이다. 신혼 때는 기술이 부족해서 외출복을 벗지도 못하고 선 자리에서 30분 넘게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지금은 옷 벗기, 물 마시기와 같은 간단한 일을 하면서 듣는다.
아내와 달리 나는 일이 있어도 되도록 삼키는 편이다. 안 좋았던 기억을 각인시키는 기분이라 떠올리기 싫었고 힘들었던 아내가 또 스트레스를 품는 것도 싫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을 풀 기회가 적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기도 어렵다. 아내를 닮아가면서 감정 표현을 조금씩 하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순한 맛 버전으로 말하게 된다.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표정 관리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정을 아내처럼 열 필요가 있다. 어제는 웃을 일이 없고 안 좋은 소식만 전하는 곳이 집이라는 생각에 일부러 밝은 이야기와 싱거운 웃음 소재를 준비해 갔다. 그런데 엉뚱하게 일상 대화 중에 아내가 크게 웃어버렸다.
“이 종목(주식)이 진짜~ 많이 떨어졌었는데 드디어 내가! 3천 원 이익 봤어. 내가~ 참 힘들었다. 안 올라올 줄 알고 진짜 가슴 졸였다? 여보, 뭐 먹고 싶어?”
“깔깔깔, 나 이게 왜 웃기지? 깔깔~”
함께 웃을 수 있고 비슷해지는 재미가 있는 아내가 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