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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ilani Oct 28. 2018

시나몬 롤과 순두부

캘리포니아 첫날 첫 끼

캘리포니아에서 세 달간 공부를 할 거라는 건, 분명한 거짓말이었다.

아니, 거짓말이라기보다 멋진 핑곗거리였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10년을 넘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에게 무시 못할 감정의 경고등이 켜진걸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알아챘다. 경고등은 스스로가 빵 하고 터져버리기 전 매우 무섭게 빠른 속도로 깜빡여댔고, 다른 이들처럼 모두 버리고 떠날 용기는 없었던 나는 '잠시 공부를 하겠다'라는 핑계를 찾아 모든 걸 멈춰두고 캘리포니아로 왔다. 13년의 세월을 3달로 위로할 수 있으리 만무하지만, 익숙한 환경, 생활, 사람들을 뒤로하고 생소하고 어색한 처음의 순간들로 나를 밀어 넣는 건 오히려 나 자신에 더 집중하고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캘리포니아 얼바인에 도착하고 학교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1주일 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동네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이곳에 익숙해지고 이곳 사람들을 관찰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무도 다그치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도 한국의 직장인답게 새벽 6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새벽 6시 기상. 룸메이트들은 아직 침대에 있는 시간이었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자 달짝지근한 향과 시나몬 향이 합쳐져 식욕을 자극 시켰다. 메릴이 시나몬 롤을 구웠다며 건넸다. 보통 룸메이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가끔씩 많은 요리를 했거나, 혹은 고마운 일이 있었거나 할 땐 함께 외식을 하기도 했다.


메릴이 만든 시나몬 롤


겉보기에도 완벽해 보였던 시나몬 롤은 맛 또한 시중에서 사 먹는 것 못지않았다. 베이킹과 거리가 먼 나는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정말 대단해. 나는 베이킹이 어렵고 귀찮기만 한데."

"베이킹이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아. 계량만 잘 하면 되거든."

아니.. 그 계량이 어렵다는 거였는데, 메릴은 베이킹을 마치 내가 라면을 끓이듯 쉬운 요리로 묘사하고 있었다.

함께 아침을 나누며 룸메이트 폴과 메릴이 물었다.

"도대체 몇 시간을 자는 거야? 잠결에 네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어."

이유 모를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새벽 6시에 일어나니 6시간 정도를 자는 것 같아."라고 대답하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돌아왔다.

"세상에 6시간이라니. 너의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행동이야."

세상에. 6시간 잔다는 말에 이런 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후로도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이 '최소한 8시간은 자야 건강할 수 있다'라는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른 아침 기상이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건 한국과 일본 출신들 뿐이었다.


"오늘은 뭘 할 예정이야?" 폴이 물었다.

"아무것도."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 행복해 스스로에 도취되었다. 아무 일도 할 게 없는 날이 있다니. 그냥 동네 산책이나 하면서 커피숍이나 가야겠다 싶었다.

굉장히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폴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할 나를 염려하며 매일 집 근처에 가볼 만한 쇼핑몰이나 카페들을 알려주었는데 대부분 걸어서 기본 20-40분은 가야 했다. 과연. 말로만 듣던 캘리포니아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첫날 찾아간 곳은 '다이아몬드 잼보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흔히들 DJ라고 불렀고, 한식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종류의 아시아 식당들이 가득하고 심지어 한국 마트와 한국 은행, 노래방도 있는 곳이었다. 한인타운도 아니고.. 캘리포니아에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13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한국 식당은 일부러 찾아가야만 했는데, 요즘엔 어디를 가도 한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점심으로 DJ에 있는 순두부 가게를 택했다.



한 끼 가격이 15000-20000원 정도로 우리나라와 비교를 하자면 비싼 순두부였지만, 미국 물가로 쳤을 때 이만큼 합리적인 가격의 식사도 없다고 외국 친구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실제로 미국, 일본, 중국 친구들은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맛도 좋고 다양한 반찬이 무제한 제공되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 순두부를 주문하면 기본 반찬으로 김치는 물론이고, 오징어 젓갈, 고구마 샐러드, 오이소박이, 어묵이 함께 나오고, 조기 한 마리가 인당 한 마리씩 나오는데 외국 친구들이 마음을 빼앗기는 포인트는 여기에 있었다. 심지어 채식주의자 친구도 '불쌍한 물고기'라고 읊조리며 너무 맛있게(!) 먹어 날 놀라게 했을 정도이다.

친구들은 나만 보면 순두부를 먹으러 가자는 통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 거의 매주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친구들은 이곳에서 한국어로 주문을 해보는 걸 굉장한 기회이자 재미로 느끼기도 했다.

이곳 순두부 집은 캘리포니아에서 나의 마지막 식사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외국에서 굳이 한국 음식 없이도 살 수 있는 내가 처음과 끝을, 그리고 수시로 허기진 배를 이곳에서 채웠던 건 순전히 외국 친구들 덕분이었다. 순두부를 먹으러 가도 괜찮냐고 그들이 물어오면 나는 답했다.


나는 순두부를 먹지 않아도 되지만, 너와 함께 순두부 가게에 가는 것은 참 좋아. 네가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즐기는 걸 보는 게 나는 더 기분이 좋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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