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는 고양이
처음 타본 알래스카 항공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시애틀에 근거지를 두고 미국 곳곳을 움직이는 알래스카 항공은 늦은 일요일 밤, 나를 시애틀로부터 캘리포니아 존 웨인 공항에 실어다 놓았다.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된다. 국내선을 타고 작은 공항에 내리니 마치 진작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다영 씨의 남편 션이었다. 우버와 리프트 기사들로 북적이는 낯선 도시의 입국장 앞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비를 돌보느라 나오지 못한 다영 씨를 대신해 션이 비닐봉지를 하나 내밀었다.
"다영이 이것저것 챙겼어. 엄마처럼."
영어가 적힌 신라면, 크래커, 작은 과일 몇 개, 비누, 큰 치약.
션의 차가 내가 세 달이라는 시간을 보낼 캘리포니아 얼바인의 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미국의 작고 예쁜 단독 집에서 혼자 사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얼바인의 주택비는 서둘러 룸메이트(하우스메이트)를 찾게 만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설정은 오히려 나를 설레게 했다. 하지만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나의 영어 선생님이었던 마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분명 룸메이트들을 싫어하게 될 거야."
"모두가 너 같지는 않을 걸."이라고 맞받아치면서도 굉장히 궁금해졌다. 도대체 미국인들에게 룸메이트라는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룸메이트들은 31살의 젊은 미국인 부부다. 둘은 한국에서 약 5년 간 살아본 경험이 있었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요가를 좋아하고, 요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처음 자신들을 소개할 때 '나는 무엇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라고 소개를 하는 건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전에 어떤 강연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직함, 직업으로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그걸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하고 그게 바로 행복의 조건이란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과연 나의 룸메이트들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얼바인 집에 도착한 첫날 폴은 콘서트에 있었고, 메릴은 가족의 집을 방문 중이었다. 부득이하게 혼자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직도 열쇠를 사용하는 미국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키를 돌려 문을 열었다.
달칵.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그 소리가 들려오자 살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소리가 들렸다.
야옹
까만 털북숭이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Hello, Pepero!"
나의 또 하나의 룸메이트, 빼빼로를 가장 처음 만났다.
빼빼로는 고양이다.
빼빼로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검은색 페르시안 고양이이다.
빼빼로는 한국에서 온 고양이다.
빼빼로는 폴과 메릴이 한국에 살 때 길거리에 버려져 있던 아기 고양이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미국까지 오게 되었다. 그날은 하필 '빼빼로데이'였고,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이 빼빼로가 되었다. 메릴은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검은색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검은색 페르시안 고양이는 매우 비싸거든."
자정이 넘어 첫인사를 하게 된 폴과 메릴은 와인 한 잔을 건네주며 이런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폴은 어디선가 아몬드 빼빼로를 꺼내 건네주었다. 세상에.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먹게 된 음식이 아몬드 빼빼로가 될 줄이야.
고양이와 동거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생전 처음 고양이와 함께 살아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고양이는 강아지와 달라서 친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저쪽에서 나를 먼저 간택해야 한다지? 주워들은 상식으로 나는 빼빼로와의 첫인사를 뒤로 하고 시간을 주기로 했다.
내 방을 찾아 들어가는데 뒤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빼빼로가 내 옆을 비집고 앉아 등을 들이댔다. 마치 자기를 만지라고 명령이라도 하듯.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들겨주니 그르릉 소리를 내며 이따금씩 꼬리를 살짝씩 흔들었다. 마치 아닌 척 새침하게 등을 돌리고 앉았지만 세상 가장 행복함을 숨기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 같았다.
빼빼로는 내가 만난 고양이들 중 가장 정도가 지나친 개냥이였다.
갑자기 촤악 하고 물소리가 났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집 앞 스프링클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첫날 들었던 이 낯선 소리들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울컥울컥 눈물이 나게 만드는 존재가 될지도 모르는 채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진짜 미국에서 살게 됐구나.
다영 씨가 챙겨준 치약을 꺼냈다.
혼자 집 구하기 : 스스로 집을 찾고, 룸메이트들을 만나보고, 그 집에 살고.
고양이와 살기 : 고양이라기보다는 개에 가까운 개냥이지만, 정말 꼭 해보고 싶었던 경험이 룸메이트들 덕분에 이루어졌다.
영어로 '학문' 공부하기 : 매 수업마다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데, 영어가 늘었다기보다는 영어를 못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뻔뻔함이 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역시 학문은 나와 맞지 않아. 나는 일하는 게 훨씬 쉽고 편하고 좋다.
클렌즈 : 한국에서도 절대 안 하는 클렌즈, 다이어트 뭐 이런 거. 친구들 성화에 한 번 경험해보게 되었다. 하루 종일 디톡스 주스만 마셨는데, 세상에.. 점심때부터 두통이 오기 시작하고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음식은 나의 전부임을 깨닫고 앞으로 클렌즈는 절대 안 하는 걸로.
eyebrow treading : 미국에서 유행을 타고 있는 눈썹 정리 방법 중 하나인데, 인도에서 넘어온 기술이다. 인도 출신 여성들이 실을 입에 물고 양 손으로 잡고선 눈썹을 정리해주는데, 우와... 정말 마법을 본 것 같았다. 이거야말로 전문직이다. 세상에 왁싱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깔끔하다. 처음이라는 말에 직원은, '걱정할 것 없어. 분명 마음에 들 거야.'라고 했는데 과연 정말!!
유니버설 스튜디오 & 디즈니랜드 : 자유여행 13년 차인데도 유니버설 스튜디오나 디즈니랜드를 가본 적이 없다는 게 나조차도 신기할 정도다.
캘리포니아 여행 : 내 인생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여행들이 생겼다.
MLB : 야구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이날 경기 자체도 엄청 재미없었지만, 미국 야구장 경험을 해봤다는 거!
축제들 : the 4th of July, surfing show...
음식들 : 가장 큰 발견은 포키(poke)다! 이밖에도 정작 미국 음식은 별로지만, 다른 나라 음식들을 기가 막히게 하는 식당들이 많다. 인생 라멘집을 만났고, 감동적인 중국 음식, 멕시칸, 몽골리안, 터키쉬 등등.. 하지만 아쉽게도 커피는 우리나라가 최고인 걸로.
그 밖에... 오늘만 해도 처음 경험해본 수많은 경험, 추억들.
- 어느 날의 일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