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ilani Nov 05. 2018

캘리포니아, 그림자놀이

혼자 노는 법

I'm sorry.


폴은 내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첫 주동안 출근을 하며 나에게 매일 이렇게 말을 했다. 폴의 와이프 메릴은 최근 UCI에 한 연구직을 따내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고, 영어 선생님으로 일을 하고 있던 폴은 출근 시간이 조금 늦은 탓에 매일 혼자 집에 남겨지는 나와 인사를 해야 했는데 그게 안쓰러웠나 보다. 언제나 아임쏘리. 라며 하루 동안 내가 가보면 좋을 카페들과 쇼핑몰을 함께 알려주곤 했다. 나는 폴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굉장히 잘, 그리고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었는 걸. 언제나 늦은 오후가 돼야 엉기적엉기적 기어 나오긴 했지만 우리 집엔 검은색 페르시안 고양이, 빼빼로가 있었다.


빼빼로는 고양이다.

풀네임은 빼빼로.

하지만 룸메이트가 부를 때는 페페.

그리고 내가 부를 때는 빼빼.

아무래도 빼빼와 내가 급속도로 친해진 건 이런 단 둘의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빼빼가 깨지 않은 조금 늦은 아침 시간, 간단히 아침을 차려먹고 나면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온몸의 감각들을 집중해서 즐기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햇살 강한 캘리포니아의 그 햇살 한 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 곳에서나 창이 뚫린 곳을 비집고 강하게 비추는 햇살은 빼빼 만큼이나 존재감이 컸다. 창문 앞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 잎사귀 모양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집 안에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냈다. 또 어떨 땐 블라인드와 어우러져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곳곳에 그려 내기도 했다.


그 순간 흐르는 음악들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어느 날은 재즈가, 또 어느 날은 영화 OST가 흘러나왔다.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놓치지 않고 그림자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몇 주 뒤 재회한 다영 씨 역시, 캘리포니아에서의 첫 주가 심심하지 않았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니, 나는 철저히 혼자였던 시간들이 참 좋았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들이 참 고마웠어.라고 대답하자 다영 씨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맞아. 너는 십 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어. 회사 교육을 둘이 같이 땡땡이치고 도망쳐 나왔을 때도, 그냥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힘이 난다고 했지."


그 말은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뭐지. 1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여전히 나는 가만히 있는 순간들을 사랑하고, 혼자서도 참 잘 지내고, 그러면서도 근본적인 외로움에 종종 시달리는구나.




그 첫 주 동안 나의 SNS엔 캘리포니아 얼바인의 그림자들이 매일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룸메이트들이 말했다.


우리 집에 그런 예쁜 그림자가 비치고 있는지 정말 몰랐어. 정말 감명 깊은 영상이었어. 고마워.


이방인의 눈으로 봐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면 알게 된다. 그동안 내가 보며 살아왔던 것들은 이 세상의 반의 반도 못 되는구나.

그동안 나는 무얼 보고 살아왔던 걸까.

왜 눈에 보이는 것들에 그리도 집착하며 살아왔던 걸까.

이전 05화 미국에서 뚜벅이로 사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