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03월의 바리스타
병원에서 카페를 하고 있다고 하면, 아주 어릴 적부터 병원 생활이 잦았던 내 병력을 알고 있는 지인들은 의문을 가진다.
너는 그렇게 병원 생활을 하고도, 병원에서 카페를 하고 싶니?
사실, 카페를 찾아 헤매다 이곳으로 결정했을 때에도 그런 고민은 없었다.
그런 질문을 받고서야
"그래... 그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치 남일 같은 깨달음이 있었을 뿐...(돈 벌어 보겠다는 생각이 너무 앞섰나?)
병간호를 했던 엄마는 병원에 발도 들이기 싫다고 하시지만 나에게 병원 트라우마는 조금 달랐다.
엄마가 그런 것처럼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병원은 이제 발도 들이기 싫어." 하는 느낌보단
일상에서 불현듯 스치는 그날의 기억 또는 그 시간에 느껴졌던 공기들이 난 힘들었다.
가령,
문득,
햇살 가득한 수술실 복도를 지나 나무로 된 수술실 출입구가 열리던 다섯 살 첫 개복수술날의 기억과,
새벽 1시가 넘어 응급수술을 들어가며 무섭다고 발버둥 치며 울었던 어둡던 복도와,
모든 수술실에서 나는 특유의 소독약 냄새,
식사시간이 되어 배식카트가 올라오면 병실을 가득 채웠던 음식냄새와 알코올냄새가 뒤섞인 공기,
수술흉터를 덮어두었던 거즈에서 나던 피 섞인 소독약 냄새,
곪아터진 흉터에서 솔솔 풍겨났던 고름냄새,
출혈로 심해진 빈혈로 주저앉았던 날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늦은 밤 서울역 로비,
겨우 서울역을 내려가 택시 대기자에게 양해를 구해 먼저 택시를 타고 갔던 응급실,
응급실에 도착할 때마다 느꼈던 안도감,
119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빈혈을 버티지 못하면 내가 저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는 공포감.
그런 기억들이 일상에서 불현듯 스쳐 지나갈 때면 찰나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고 숨 한번 크게 들이쉬며 걸음을 옮겼지만 그렇다고 트라우마라며 유난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날 잘 몰랐을까?
지인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병원에서 카페를 함에 있어 나의 한계를 느끼는 곳이 있기는 했다.
수술실 앞은 힘들었다. 상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불안이었다.
이곳에 카페를 오픈하고 수술실에 첫 배달을 가서는 수술실에서 나던 그 고유의 냄새에 몸이 굳어버렸다.
정신을 챙겨 음료를 전달하고 내려오길 반복했지만 몇 달이 지나서도 그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언니에게 이실직고를 하고 수술실 배달은 언니에게 가달라고 부탁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가족인지라 부모님 귀에 들어갈까 염려가 되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간은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던지, 이제 제법 아무렇지 않은 척 수술실 배달을 간다.)
길을 가다 들리는 다급한 앰뷸런스 소리에 내 발걸음이 멈춰지지 않도록,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도록,
문득 스쳐가는 공기들에 병원을 떠올리지 않도록,
병원에서의 카페 운영이 흐릿해졌던 기억을 불러내지 않도록,
일상의 평온함이 지속되어 상처가 된 그 기억들이 조금 더 옅어지길 욕심 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