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을 종료합니다

취준일기

by 레룬

오퍼레터를 받았고 사인을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꼼꼼히 검토하고 사인까지 했는데도 실감이 안 난다. 그동안 준비해온 흔적들과 지나온 시간들을 쭉 떠올려보면서 한참 뿌듯해했다가, 한 달 뒤부터 시작될 회사생활에 대한 크고 작은 걱정이 살며시 올라온다. 순도 높은 기쁨이었던 대학교 입학과 첫 인턴 합격 당시보다는 조금 더 탁한 기쁨이지만 썩 나쁘지 않다. 적당히 긴장되고 설레는 기분이 좋다.




1. 취준기를 어떻게 보냈나


1) 막학기 초반

본격적으로 취준을 생각한 건 대학교 마지막 학기였다. 당시엔 막연히 IT 업계가 재밌다는 생각 뿐이었고, 희망 직무나 기업이 뚜렷하지는 않았다. 크게 데이터 직무와 IT 기획 직무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양쪽으로 서류를 지원하고,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데이터분석 프로젝트를 병행했다. 서류전형에서는 약 60%(10/17) 합격했으나 대부분 필기/인적성에서 떨어졌다.


시험 공부가 부족했던 것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를 두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로, 전반적으로 자기이해와 기업이해가 부족한 것. 두 번째로는, 애초에 내가 국내 대기업 인재상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것. 필기/인적성 전형이 단순히 문제풀이력을 측정하는 게 아니라 간절함 + 집중력 + 회사에 대한 로열티 + 핏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고 느꼈다. 구체적인 취업 계획 없음 > 단순히 취업하고 싶다는 목표만으로는 동기부여 안 됨 > 간절함과 로열티가 없는 게 필기/인적성에도 드러남 >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함. 이 악순환이 반복되는 듯 했다.


2) 막학기 중후반

IT 스타트업에서의 인턴 경험이 두 번 있었지만 바로 취업하기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공채 시즌을 한 번 경험해보면서 대기업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JD를 아무리 봐도 어떤 식으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는데, 대기업에서 인턴생활을 해보면 기업에 대한 이해도와 내 업무성향을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준비할 면접도 없는 데다 2024년 하반기 공채 시즌도 거의 끝났겠다, 남은 하반기는 인턴을 해보면서 2025년 상반기 취준을 노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중간고사 기간 즈음, 너무나 운 좋게도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대기업 인턴 자리를 구했다. 이렇게 R&R이 세부적으로 짜여있고 업무 가이드라인이 세세히 마련되어 있는 환경은 처음이었다. 정기적인 보고체계가 있는 것도 신기했고, 내가 보고 드리는 상사분 또한 누군가에게 보고를 드려야 한다는 걸 의식하면서 업무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AI/IT 트렌드 리서치 업무를 하면서 나는 분석이 핵심인 직무 + ② 변화에 수용적인 문화, 변화를 제안하는 역할 + ③ 형식과 프로세스가 어느 정도 잡혀있는 업무환경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골치 아파졌다..)


3) 졸업 후

2025년 2월에는 마지막 인턴을 마무리하고 바로 대학교를 졸업했다. 쌩 취준생이 되었는데 여전히 막막했다. ①②③을 모두 만족하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ChatGPT랑 상담을 자주 했는데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의 어딘가로 가는 게 잘 맞을 거라고 했다. 그게 도대체 어딘데.


성향적으로 변화와 성장을 주창하는 IT 스타트업이 잘 맞지만, 어느정도 프로세스가 잡혀있고 분석에 치중된 포지션이 있으려면 최소 시리즈 C-D 이상의 규모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입 TO가 있는 곳이 국내에서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위 조건을 만족하는 외국계 기업을 1순위로 삼고, 나머지는 수시채용으로 진행되는 계약직/전환형 인턴을 노려보거나 공고가 안 올라온 곳에도 인사팀에 직접 연락해보는 방향으로 취준계획을 잡았다.


거의 수시채용을 위주로 13곳에 지원해서 4곳에서 면접 기회를 얻었다. 비교해보면 공채 위주로 넣었던 2024년 하반기 때와 지원한 기업 수는 비슷한데, 수시채용으로 절차가 빠르게 진행돼서 그런지 훨씬 수월한 느낌이었다. 면접 경험이 한 번씩 늘어날수록 실력도 빠르게 붙는 게 느껴졌다. 첫 번째 외국계 면접에선 직무핏 안 맞아서 탈락 > 두 번째 유니콘에선 컬쳐핏 면접에서 탈락 > 세 번째 외국계 면접에선 직무핏 & 컬쳐핏이 모두 잘 맞는다는 느낌을 나도 받았고, 최종합격을 받았다.




2. 느끼고 배운점


1) 취준에 정도란 없다

뭐든 그렇겠지만, 자기한테 맞는 취준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특히 다양한 취준루트의 난이도가 모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인만큼 취준에도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포트폴리오/이력서 만들기, 필기시험 준비하기, 기업별로 다른 면접 스타일에 적응하기 - 결이 전혀 다른 여러가지를 병행하다보면 과부하가 오고 효과가 떨어지기 쉽다. 나는 <포트폴리오 퀄리티 높이기 + 실무경험 위주의 면접 준비>로 뚫을 수 있는 채용 전형들에 집중했고, 과감히 필기시험이나 PT면접은 준비하지 않았다. 스터디 대신에 어쩌면 취준과는 연관 없어 보이는 동아리 활동을 새로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대면했고, 여행을 다니면서 충전한 긍정적인 기운들이 면접에서 나다운 모습을 내비추는 데 정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취준생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것"은 없다. 내 자신을 더 잘 알고 내 잠재력을 잘 어필할 방법을 고민하면 된다.


2) "내가 잘하는 것"에 꽂히지 않아도 된다

취준생활 중에 가장 막막했던 순간 중 하나는, 내가 딱히 잘하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였다. 취업이 <누가 누가 더 잘 하나>를 겨루는 경쟁처럼 느껴지고 나는 어디에서도 상위권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취준을 시작하는 과거의 나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잘하는 것을 고민하기보다 <내가 어떤 모양인지>를 더 고민하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교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공부한 걸 잘 쌓아서 시험으로 평가받는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어서 졸업 후에 이어지는 취업 과정에서도 무언가를 <잘 해야 한다>의 프레임에 갇히기 쉬운 것 같다. 그런데 기업에서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역할>을 필요로 하고, 단순히 이 업무를 잘 할 사람보다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뽑는다. 그러니까, 단편적으로 <능력>이란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나의 성향, 성장배경과 가치관, 업무적 경험이 아니어도 나의 일부분이 되어준 다양한 경험들을 입체적으로 고려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게 소재와 전략이 될 수가 있다.


3) 타협해보는 것도 괜찮다

취준 초기에는 취업이란 인생의 이벤트를 너무나 잘 해내고 싶고, 완벽한 선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물론 직무, 회사, 근접거리, 보상 등 취업하고 싶은 곳을 정할 때 고려하는 여러가지 조건들이 마음에 쏙 들면 너무 좋다. 그런 곳을 찾기가 가능하기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굳이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곳을 찾기 위해 골머리 앓을 필요는 없다는 주의다. 차라리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정 부분 타협해보는 경험으로 가져가는 것도 굉장히 유의미할 것 같다. 실무에서나 인생 전체로 보나 이게 중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선택을 하는 것도 좋지만, 취준 당시의 내 상황과 생각을 충분히 존중해주는 것과, 후회되지 않는 선택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앞으로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취업을 내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엄청 심각하고 대단한 무언가로 여기면서 그것에 압도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산 하나를 넘고 나서 뒤돌아볼 때면 "더 순간순간을 침착하게 즐겨볼 걸-"이란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등산하고 있는 당시엔 이 마인드셋을 유지하기 어려워서 주기적으로 상기시켜줘야 한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기간에도 매일 매일이 소중하고 유의미하다고.


다음 글에서는 입사일까지 남은 한 달을 어떻게 잘 보내볼지에 대해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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