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일기
1. 어쩌다 주인공
스물넷이 된 올해, 비로소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만한 최소한의 데이터가 모인 것 같다고 느꼈다. 삶의 단계마다 상황이 달라졌어도 그 속에서 꽤나 비슷하게 반복되는 사고와 행동 패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패턴에서 벗어날 때면 결국 시간을 조금 더 들여 다시 그 패턴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걸 인지하고 나서부터는 “결국 나는 가야할 길로 가게 되어 있다”는 말을, “내 길을 고수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는 말을 깊게 새기고 내 별난 구석들을 잘 마주하고 관리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반복하고 있는 나의 패턴 중 하나는, 얼떨결에 주인공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람들 앞에 자주 나서야 하는 자리’. 누구에게는 기쁘고 감사한 기회겠지만 스포트라이트 받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그저 곤혹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이다. 혼자 생각에 몰입하는 시간이 편하고, 외부와의 즉흥적인 교류는 최대한 피하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인지형 내향인이다. 여기서 문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기여감을 최대화하려는 마음과, 한 발짝 앞을 본능적으로 그리게 되는 미래지향성이 자꾸만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내가 이걸 해보겠다, 우리 이렇게 하면 더 좋겠다라는 말이 꼭 내가 이끌겠다라는 의미로 쓴 건 아니었으나 학창 시절엔 종종 그렇게 오역되기 쉬웠다. 팀장이든 PM이든 ‘나서는’ 자리에 익숙했지만 즐거움보단 의무감에 가까웠다.
사실 리더의 자리를 즐기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내게 특별한 기술력이 있으면 모를까,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뼛속까지 문과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글, 말, 사람 관계를 잘 해야하는 게 당연했고 그렇다면 리더의 역할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리더와 팔로워라는 이분법에 세뇌되어 훌륭한 리더로 성장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었던 학생의 마음으로는, “잘 하는 사람”과 거의 동의어처럼 보이는 “리더”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건 무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 한 쪽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으면서도 사람들 앞에 주목받는 자리에 스스로를 더더욱 밀어넣었던 것 같다.
2. 리더형은 따로 있다
그 “어쩌다 리더” 패턴의 절정은, 스타트업을 세워보겠다고 자금을 끌어모으던 약 반년의 시기였다. 1년 간 함께하다 떠났던 작은 조직의 대표님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었다. 우리에게 딱 맞는 지원사업이 있으니 투자금을 받아서 시들해져가고 있는 조직을 함께 살려보지 않겠느냐고. 며칠 밤 새가며 방향성을 논의하다보니 아직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조직에 애정이 크게 남아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또 다시 “어쩌다 부대표”를 맡게 되었고, 그 후로부터 이어진 반 년이 리더십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투자금을 몇 천 모으는 건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팀은 어느새 10명으로 불어났고, 투자자의 압박은 날로 강해지고, 네트워킹에서도 빠질 수 없으니 여기저기 소개를 받다보면 하루는 미팅으로 꽉 찼다. 실무도 챙겨야 하는데 성과는 안 보이고, 팀원들의 불만이 하나둘씩 들리더니 결국에 몇 명은 팀을 나가기를 선택하고, 주변의 은근한 무시가 담긴 말들이 점점 크게 들렸다. 그 와중에 투자자와 남은 팀원들 앞에서는 사기 가득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창업가형 리더에게는 심리적 체력, 다른 말로는 감정적으로 무딘 면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늘 의심과 불안을 품으면서도 겉으로는 확신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미움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쏟아지는 조언들 사이에서 결국 혼자 결정하고 감당해야 되는 고립감을 견뎌야 한다. 감정과 생각이 풍부한 내게는 과부하 오는 환경이었다.
성향적으로 안 맞는 일을 경험했던 이 기간은 새로운 고민의 방향성을 안내해주었다. “영감과 사기를 불어넣는 역할”이라는 리더의 반짝스러운 모습 이면에 리더가 현실에서 감내해야 되는 어두운 면을 알게 되고 나서는 더 이상 리더 자리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내가 발휘하고 싶은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더 자리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니 현실에서는 리더와 팔로워가 이분법적으로 나뉘지도 않고, 리더십의 유형은 너무나도 다양한 데다, 누구나 본인마다 타인에게/조직 내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스타일이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선명해졌다.
3. 스타트업과 대기업 사이에서
리더 자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더 이상 없었지만 기여감에 대한 욕심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개개인이 큰 임팩트를 만든다는 스타트업의 이상에 공감하면서, 당시 가장 궁금했던 스타트업에 들어가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일할 때 의미있다고 느끼는지를 탐색하던 기간이었다.
당시까지 나는 내 영향의 크기를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위의 크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인턴생활을 하던 팀 내에서 같은 포지션은 팀당 한 명 뿐이라 내가 손 뻗을 수 있는 영역 자체는 넓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심히 일하면서도 이 팀과 프로덕트에 확실히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은 들지 않았다. 속도가 생명인 조직이었던 만큼, 미덕으로 여겨지는 빠른 액션을 위해서 섬세함과 신중함은 희생되어야 했다. 작업의 우선순위도 수시로 바뀌었으므로 어제까지 중요하던 일이 하루아침에 무의미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만 유효하다"라는 생각에 자꾸만 스스로가 작게 느껴졌다. 내게는 내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보다 그 일이 이 조직과 제품에 확실한 도움이 된다는 맥락적 의미가 중요했기에, 그 맥락이 흔들리기 쉬운 구조인 스타트업은 내게 쉽게 소진되는 환경이었다.
너비: 문제 해결의 수혜자 수
깊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솔루션이 영향을 미치는 정도/ 솔루션의 퀄리티
길이: 문제 해결 솔루션이 지속되는 기간
*임팩트의 크기: 너비 x 깊이 x 길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임팩트 정의를 빌려오자면, 나에게는 "길이"가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였다(길이>깊이>너비 순으로 사고하는 것 같다). 조금 천천히 검증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개선하고 설계하는 일에 관심 있고, 직접 초에 불을 붙이기보단 그 불을 꺼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에서 유의미함과 기여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사람의 집합"에 가까운 스타트업보다는 "프로세스의 집합"에 가까운 대기업에서 내 자리처럼 느껴지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4. 내향적인 매니저
주목 받는 역할을 잘 수행해내는 사람들을 내심 동경해오다가, 막상 그런 기회가 오면 어김없이 과부하에 걸리곤 했던 나는 드디어 내게 편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과 생각의 정밀도가 중요한 조율자의 자리다. 고심해서 설계한 한 달짜리 팀 트레이닝 프로세스가 무탈히 완수되었을 때, 그 한 달로 향후 몇 달동안 안정적인 지표가 이어질 때, 내가 만들고 개선한 문서/미팅 구조가 다른 프로젝트나 다른 PM들에게서 활용될 때 충만한 보람을 느낀다.
회사생활에서 나름의 사투를 이어가고 있을 내향인들이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용해서, 회의에서 말을 청산유수로 못해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긴장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부족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이 종종 목소리가 크고 진취적인 사람들에게 확성기 하나 더 쥐어주는 듯 느껴질 때가 있지만, 주목받지 않아도 중심이 되는 법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