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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Aug 25. 2023

흔한 부부의 일상

20년 차 부부의 데이트

결혼 초기에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라는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결혼하면 그러는 게 아니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신혼에는 함께 있으면 좋고, 가끔 손만 닿아도 전기가 통했다.  남편과 둘이만 있고 싶었다. 결혼하고 7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29살에 결혼해서 35살이 되도록 남편은 내게 설레는 사람이었다. 콩깍지가 벗겨질 때쯤 임신을 했다. 출산과 육아를 하는 동안 나는 아내에서 엄마로 변했다. 엄마에서 여자로 돌아올 때마다 아이가 생겼다. 5년 동안 세 아이를 낳았다.


남편이 이제는 안 된다고 하며 각방을 선언했다. 나도 아이들 키우느라 바빠서 오히려 좋아를 외쳤다. 4살 어린 와이프가 하는 말에는 그저 좋아 웃던 오빠도, 남편이 말도 하기 전에 마음을 알아차리던 천사 같은 나도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 변했다고 말하며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는 시간을 보냈다.


막둥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남편이 골프를 배우자고 했다. 육아우울증과 갱년기초기 증상으로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편은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다. 골프장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못 이긴 척 같이 골프를 배웠다. 아무리 싸워도 다음 날 골프연습장에 가야 했다. 골프레슨을 받아야 했다. 차를 타고 삐친 걸 티 내느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슬쩍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싸웠던 건 쏙 빼놓고 골프 얘기를 한다.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온다. 골프에 재미가 붙으면서 할 얘기가 많아졌다. 예전처럼 수다쟁이가 됐다.


 요즘 우리는 함께 헬스를 하고 있다. PT 받는 날은 서로 힘들어서 신경을 못 쓴다. 저 멀리서 남편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잘하고 있구나 생각한다. 오늘은 자유운동을 하는 날이다. 남편이 졸졸 따라온다. 귀여워서 핸드폰을 가져왔더니 뱃살이 빠졌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줬다.



20년 차 부부의 데이트코스는 간단하다. 오전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헬스장에 간다. 운동하는 배우자를 맘껏 비웃어 준다. 땀을 빼고 나와서 동네 단골내과로 간다. 혈압을 잰다. 누구 혈압이 더 낮은지 치열하게 경쟁한다. 각각 고혈압약과 고지혈증 약을 탄다.  집에 오는 길에 콩국수를 먹었다.



집에 오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책도 읽고 글도 써야 하는데 남편이 커피를 외친다. 살짝 째려보다 말고 원두커피를 내리고 예쁜 컵받침과 함께 건넨다. 뭐 볼 거 없나?


보고 싶었던 넥플릭스 드라마를 켠다.  같은 소파에 앉아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가끔 발끝이 닿으면 화들짝 놀란다. 드라마를 보다 막둥이의 전화를 받고 학교에 간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아이들 셋을 픽업하고 나면 하루가 간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은 시간이 자유롭다. 가끔 출근을 하지 않는다. 나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데 남편이 출근을 하지 않으면 당혹스럽다. 예전에 왜 안 가냐고 정색하고 물었다가 삐친 게 오래갔다.  언제 갈 거야? 하고 물으면 나 보내고 뭐 하려고 묻는다. 참 말을 이쁘게도 하는 사람이다. 그런 말에 상처를 받던 여린 여자는 사라졌다. 말을 해 줘야 나도 계획을 세울 거 아닙니까. 대답하고 살짝 째려본다.





나이가 들면서 아들보다 더 아기가 되는 것 같다. 그럴 때는 달래주는 게 좋다.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쓰고 남편 옆에 앉는다. 이런저런 말을 꺼낸다. 남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덕분에 나는 하루가 미뤄졌다. 하지만 또 함께 한 시간이 있었으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당신은 하늘입니다. 당신이 최고입니다. 생각하면 만사형통이다. 답답하면 소주 한 병 마시고 푹 자면 된다. 결혼 20년 차 나만의 살아가는 비법이다. 바람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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