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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Sep 07. 2023

자화상

-자작시는 자작자작 태우는 게 맛입니다-


아주 오래전


 길을 걷다 우물 하나를 발견했다.




지쳐서 숨을 고를 때였다.


어디선가 아직은 아니라는 소리가 들렸다.




줄을 잡아당겼다


몸을 숙이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어둠




그 안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아직은 아니다는 말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가시에 찔린 듯 움찔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뭐라 해야 했다






두 발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고개를 숙이는 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거였다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메아리소리를 들으며 걸어 나왔다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살다 어느 날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하늘은 이토록 높고 푸른데 마음은 왜  검고 어두운지 모르겠습니다.



제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몸집 크고 울 줄 모르는 괴물입니다.  가끔 답답하다며 소리를 지르는 날이면 글을 씁니다. 안에서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글을 씁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존재만은 확실합니다.




가끔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것도,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도 괴물의 농간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뭐라도 된 마냥 걷습니다.



구름은 시시 때때 모양을 바꾸고 바람은 제 마음대로 불었다 말았다 하는데, 그 모든 것에 의미를 찾느라 정작 제 마음은 팽개쳐 놓았습니다. 섭섭해서 등을 두들기는 날이면 하루종일 슬퍼서 꺼이꺼이 울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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