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엄마가 사 준 청바지가 보이지가 않았다. 등교시간은 다가오고. 버스 놓치기 전에 가야 하는데 오늘 입으려고 어젯밤에 녹색스웨터와 청바지를 꺼내 놓고 잤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중얼거리다 학교 늦는다는 엄마의 말에 다른 바지를 입고 툴툴대며 정거장으로 갔다. 하루 종일 청바지가 어디로 갔을까만 생각했다.
집에 와 보니 세 살 아래 동생은 소풍을 갔다 와서 남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뭐야? 동생이 내 새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입으려고 3일이나 참았던 새 청바지를. 나도 아직 한 번도 안 입었는데 소풍에 입고 갔다 오다니. 화가 났다.
다짜고짜 동생의 어깨를 한 대 때렸다. 과자를 먹다 말고 매를 맞은 동생이 서럽게 울었다.
-너 누가 이거 입으랬어? 내 청바지를 네가 왜 입었냐고?
말을 하면서도 악에 바쳐 동생의 등과 머리를 계속 때렸다.
-엄마가 입으라고 했어.
- 넌 엄마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야? 내가 내일 입고 간다고 어젯밤에 분명 얘기했지? 왜 내 말을 안 듣는데
손이 아팠지만 꾹 참고 동생을 때렸다. 동생은 엄마 핑계를 대면서 잘못했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세 살이나 어린데 키가 나보다 더 큰 동생이 미웠다. 그리고 분명 내 청바지라고 했는데 동생에게 입으라고 말한 엄마도 미웠다. 동생의 울음은 점점 커져갔다.
마침 마당에 들어서던 엄마는 동생을 때리고 있는 날 보더니 플라스틱 옷걸이를 들었다.
- 왜 착한 동생을 때리냐
- 옷도 같이 입으면 돼지. 니 거 내 거가 어딨어.
엄마는 내가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하며 내 다리를 옷걸이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플라스틱 옷걸이는 매웠다. 억울했다. 동생말만 듣고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는 엄마가 싫었다. 한참을 때리던 엄마는 제 풀에 지치셨는지 방으로 들어가셨고 동생은 쭈뼛쭈뼛 눈치만 보다 엄마 따라 들어가는데 그 모양이 또 보기 싫었다.
그냥 다 싫었다. 맨날 나만 잘못했다고 말을 하는 엄마도, 엄마말이라면 무조건 예하고 대답하는 크고 일 잘하는 동생도 보기 싫었다.
-집을 나가자. 이 집에서 나만 없으면 돼. 다들 행복하게 살라지. 나가서 아주 불행해질 거야.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렇게 평생 나한테 미안해하면서 살아봐.
집을 나왔는데 갈 데가 없었다. 집 옆 도로에 옆집 아저씨의 10톤 트럭이 길에 세워져 있었다. 커다란 바퀴가 편안해 보였다.
- 그래 조금만 쉬고 가자.
하도 울어서 진이 다 빠졌던 나는 그 트럭 바퀴에 기대 잠이 들었다. 포근하고 기분 좋은 잠이었다. 역시 울고 나서는 잠이 잘 온다니까. 혼잣말을 하며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적당히 부는 바람에 눈물자국이 지워졌다.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다. 엄마가 내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어디 갈 만한 데가 있는가?
- 친구집에는 전화를 해 봤는가?
나가기가 머쓱해져 가만히 앉아 호들갑을 떠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은근 통쾌해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기대고 있던 바퀴가 부르르 하더니 차가 움직이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서둘러 바퀴에서 빠져나왔다. 집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쏜살같이 달려와 내 손을 잡고 끌어 집에 데리고 오더니 또 등짝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다 어디를 간 거냐고.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반가운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몰랐다. 나도 설움이 복받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동생도 울고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아빠는 안방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그만하라고 말을 하는데 세 여자의 울음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퉁퉁 부은 눈이 무거워 제대로 눈도 못 뜨며 학교로 갔다. 동생눈도 엄마눈도 똑같이 부어있는 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자리에 누웠는데 문득 그때 장면이 떠올랐다. 30년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어제 일은 기억을 못 하는데 왜 지나간 일들은 이리도 생생한 건지 모르겠다. 세월이 무상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은 없는 우리 엄마와 여전히 나보다 훨씬 크지만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인 동생과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세월이 있다. 함께 지낸 시간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나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