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우리 집이 있는 동산 아래에 있었는데, 내려갈 때는 5분, 올라올 때는 10분 정도 걸렸다. 길가에 있는 작은 슬레이트 집이었다. 살림집은 안쪽에 있었고, 길가에 나 있는 새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갖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담배와 술, 과자와 라면, 식용유와 콩나물, 두부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안 보여서 찾으면 연정이할머니가 안에서 물건을 가져왔다. 슈퍼이자 만물상이었던 "연정이네"주인은 꼽추할머니였고, 혼자서 손녀인 연정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연정이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그냥 연정이라고 불렀다.
내가 8살 때 연정이네 할머니와 키가 똑같아졌다. 아빠는 저녁을 먹을 때면 큰딸인 내게 술심부름을 시켰다. 겨울밤에 동생과 후레시를 들고 아빠가 마실 사 홉 들이 술과 담배를 사러 연정이네 가게에 갔다. 가로등 없는 길이 무서워 노래를 크게 부르며 갔다. 연정이네 할머니는 꼭 우리 두 명에게 사탕을 하나씩 쥐어 주었다. 착하다 착하다고 말했다. 나는 뭐가 착한 지 몰랐지만 사탕이 맛있어서 인사를 잘했다.
연정이네 할머니는 콩나물을 오백 원어치 사면 천 원어치 만큼 싸 주었고, 백오십 원이면 백 원만 받았다. 항상 많이 주고 적게 받았다. 나는 연정이네 할머니처럼 장사를 해서 어떻게 하나. 망하지 않을까? 항상 걱정이었다.
하지만 동네에서 하나뿐인 가게여서 그랬는지 사람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연정이네 가게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연정이할머니는 가끔 가게에 없을 때가 있었다. 동네 할머니들과 방에서 화투를 치거나 화장실에 있거나 밖에서 목소리만 들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연정이네 할머니는 그 앞에 돈을 놓고 가라고 말을 하곤 했다. 연정이네 가게 현관에는 항상 돈통이 있었다. 가득 찰 때도 있었고, 돈이 적을 때도 있었다.
그날도 뭔가를 사기 위해 연정이네 가게에 들른 나는 돈통에 동전이 가득 있는 걸 보았다. 나는 크게 할머니를 불렀다. 저 멀리서 돈 놓고 필요한 거 가져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뭘 사러 왔는지도 까먹었던 것 같다. 돈을 놓는 척하며 더 많은 동전을 집어 들었다. 가슴이 얼마나 많이 뛰었는지 모른다. 금방이라도 새시문을 열고 동네아저씨가 들어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에 쥔 동전의 묵직함이 좋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아무렇지 않게 가게를 나왔다. 집에 가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방에 가서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꺼내 봤는데 이천 원은 된 것 같았다. 나를 믿는 사람에게 처음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에 그날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 후 연정이네 가게에 갈 때마다 혹시 연정이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생각했다. 모르는 것 같았다. 다시 돈에 손을 댔다. 내가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연정이네 할머니는 이상하게도 항상 밖에 있었다. 가게에 가는 게 뭘 사기 위해서인지 아닌지 몰랐다. 나는 내가 점점 무서워졌다. 무섭지만 달콤한 그것은 강렬한 유혹이었다.
어느 날 연정이할머니가 안에서 손을 닦으며 나오더니 맛난 게 있다며 먹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괜찮다고 했는데 따뜻할 때 얼른 먹고 가라고 해서 처음으로 연정이네 할머니가 사는 방에 들어갔다.
방은 연정이할머니의 키만큼이나 작았고, 연정이언니가 누워 있었다. 언니는 어딘가 아픈 것만 같았다. 연정이할머니는 누워 있는 언니에게 일어나 먹으라고 했지만 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연정이할머니는 학교공부가 힘들지는 않으냐. 너네 아빠는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느냐. 너네 엄마가 걱정이다. 하시며 그래도 엄마가 네 칭찬을 많이 하신다. 동생들 잘 건사해라. 하셨다. 나는 처음으로 연정이할머니의 눈을 쳐다봤는데 눈이 너무 검고 예뻐서 깜짝 놀랐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먹었다. 찐빵이 따뜻했다.
얼마 안 있어 연정이할머니는 교통사고가 난 지 하루 만에 돌아가셨다. 잘못을 영원히 묻힐 수 있다는 안도감과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두 가지 감정이 생겼다.
동네에서 유일한 가게였던 "연정이네"는 젊은 부부가 인수했다. 나는 연정이네 할머니가 없는 연정이네 앞을 지날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휩싸였다.
13살이었고, 뭔가에 항상 화가 나 있었다. 갖고 싶은 것은 많은데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나의 비뚤어진 욕망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고, 어쩌면 가장 약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쉽게 저질렀던 범죄가 연정이할머니의 묵인에 의해 덮어졌다.
연정이할머니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돈통에 돈이 많이 들어있어도 알지 않았을까.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가게를 들락날락하며 매일 안쪽을 기웃거리며 할머니가 있나없나를 살폈다.
그때의 경험이 나를 성장시켰는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날 이후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게 스스로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를 알게 됐다. 누군가를 속이는 건 쉬울 수도 있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있을 때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지만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결심을 하자 행동을 정하는 것이 쉬워졌다. 시골 중학교에서 아이들이 일탈행위를 할 때도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다. 대학에서 많이 망가지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맘을 다잡을 수 있었던 건 그래도 혼자 성립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연정이네"할머니를 생각하면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곧추세우게 된다.
동네친구들을 만나면 예전이 몸은 힘들었어도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말을 한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어서 떠나고 싶었는데 왜 지금은 돌아가고 싶은지 모르겠다. 고향이 시골이라서 좋다. 할 말이 많아서 좋다.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그리움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