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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무용한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

by 레마누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사랑한다. 아무 쓸데도 없는데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

가을바람. 텅 빈 하늘, 따뜻한 말 한마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햇살에 흔들거리는 하얀 이불포, 하늘거리고 나풀거리는 것들이 좋다. 나는 그저 아무 소리 못하고 바라볼 뿐이지만 그들도 제가 아름다운 걸 알고 스스로 빛을 내어 반짝인다.


젊고 아름답던 어머니가 시내생활을 접고 야반도주하듯 시골에 있는 시댁으로 들어간 건 35살 때 일이다. 시내의 화려함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그곳에서 못 견디게 지루함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25살 때 낳은 큰딸이었다.


다행히 저를 닮아 얼굴이 예쁘고 행동거지도 좋았던 그 아이에게 제주시 옷가게에서 첫눈에 반한 빨간 망토를 입히고 학교에 보냈다. 검은 머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왔던 딸은 빨간 망토가 어울리는 하얀 얼굴을 가졌다.


동네의 말하기 좋은 여자들이 그녀를 두고 쑤군거렸다. 교실에 앉은 그녀의 딸은 아무 쓸데도 없이 그저 예쁘기만 했다. 아무 상관없었다.


그녀는 옷 갈아입히기 인형놀이를 하듯 딸의 옷을 입혔고, 시골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딸은 세게 조여매는 철사처럼 그녀의 마음대로 구부러지는 분재가 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형제들은 아름다웠고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았으며 서로를 칭찬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 처음 건네는 인사는 어쩜 너는 그대로 예쁘니? 어머 너 정말 예쁘다. 너는 진짜 예쁘다. 였다.



잘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만나는 그 순간이 아름다우면 그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유독 예쁜 것. 아름다운 것에 집착했다. 엄마가 언제부턴가 사진을 찍기 싫다고 하며 뒤로 물러섰다. 목욕탕에 가면 거미처럼 마른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다며 속상하다고 했다. 어쩌면 그녀는 죽기보다 싫은 게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사랑한다. 나는 그 시절 아름다움을 쫓던 어머니를 닮았다. 밥 먹을 돈이 없어도 꽃을 사고 들어왔다. 아무 쓸모없지만 가을이면 낙엽을 밟고 겨울에는 눈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숄을 두르면 어깨가 따뜻하다. 목을 끼우면 어깨가 덮이던 그때 그 시절 케이프스타일을 좋아한다. 어깨움직임이 어색한 게 이 옷의 핵심이다. 불편함은 우아함의 필수요건이다.


시골에서 빨간 망토를 입혀 보낸 그녀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더벅머리 아이들 틈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고 양장점에서 맞춘 치마와 마의를 입고 공부를 한다. 난 언제나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친구들처럼 밭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늘어난 엄마옷을 입고 오는 게 아니라 딱 맞는 내 옷만 입었다. 내가 지나가면 친구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우리 속 동물처럼 구경거리였지만 괜찮은 척했다. 엄마가 좋아하면 나도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의 관심이 시들해졌다. 나도 나만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엄마가 내게 한 것처럼 나도 두 딸이 예쁘고 반듯하게 자라길 바란다.



미스터선샤인에서 김희성은 세상의 무용한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는 봄, 꽃, 날리는 꽃잎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어떤 쓸모도 없이 그저 예뻐서 샀던 빨간 망토는 무용함을 사랑한 엄마의 숨구멍이었다.


쓸모가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밥을 먹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그렇다면 밥만 먹으면 사람은 살 수 있을까?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좋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살았다. 사람이 사람 같음은 그저 먹고 자는 것에서 조금은 벗어나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무 쓸모없는 것에도 하루종일 마음을 뺏길 수 있다는 것은 아닐까?


그저 예쁘기만 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도움이 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지만 마음이 고프면 살아갈 의지가 꺾인다. 작은 것에도 만족을 얻고 희망을 찾고 예쁜 것을 보며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이 험한 세상도 충분히 살 만할 것이 된다.


나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고 아무 쓸데도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 옛날 시골길에서 빨간 망토를 입고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씩씩하게 집으로 향했던 그 시절의 나를 사랑한다. 실용성도 없고 정말이지 예쁘기만 한 옷을 입히면서 우리 엄마가 했던 작은 탄식을 기억한다.


엄마는 아침마다 쌀뜨물로 세수를 하고, 밭에 가기 전에 선크림을 발랐다. 갈중이를 입고 일을 하면서도 시내에 나갈 때는 세련되게 옷을 차려입곤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허름한 옷장을 봤다. 엄마가 입었던 옷들은 오래되고 구겨져 있었다. 물건이 엄마를 빛낸 게 아니라 엄마 자체가 빛이 났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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