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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 이상

어딘가에서 가을을 타는 중입니다

by 레마누


이런 시


- 이상 -


역사(役事)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 내어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 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 걸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 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 보니까 변괴로다


갈 데온 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찍어 버리고 싶더라.







내가 사랑하는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고, 글쓴이가 이상이라는 사실에 또 놀랐다. 가을에 이토록 어울리는 달달한 사랑 시가 있을까?


언제나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사랑이라는 말.


평생 잊을 수 없다는 사랑. 내내 어여쁘소서라는 문장을 읽을 때면 혼자 얼굴이 빨개졌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을 해 준다면 나는 그저 좋아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상의 시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이 시는 사실. 달달한 사랑 시가 아니다. 4연에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 즉 사랑 시를 찢어버리고 싶다고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이상의 마음을 것이다.


이 시국에 달달한 사랑 시가 웬 말이냐. 정신 차려라.라고 어떤 돌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시는 사랑 시로 기억된다. 아니다. 3연만 똑 떼어놓고 감상한다. 전체를 보려 하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나부터 그렇다.


시는 쓰는 순간 시인에게서 떠나간다는 말이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와 느낌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굳이 시인이 꽁꽁 숨겨놓은 함축적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보다(그건 학교 다닐 때 시험공부하면서 열심히 했으니까) 그저 맘 가는 대로 읽으며 느끼는 그대로 시를 읽는다면, 시가 조금 더 쉽고 다정하게 말을 걸지 않을까?



시 읽기 좋은 계절이 왔다. 노래방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모두 가수가 되듯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우리는 금세 시인이 된다.


만일 시를 쓴다면 아주 달달하고 예쁜 사랑 시를 쓰고 싶다. 마치 진짜 사랑을 하는 것처럼 그리움에 잠 못 들고 싶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벽돌색카디건을 샀다. 친구와 만나 커피만 만날 예정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옷이나 보러 가자고 했다. 7월에 운동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목표를 세웠다. 앞자리가 바뀌지 않을 때까지 옷을 사지 않겠다고. 석 달째 옷을 사지 않았는데 결심이 무너졌다. 그만큼 예쁜 카디건이었다.


봄이 부드러운 실크스카프라면 가을은 무조건 니트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입지 못하는 것도 니트다. 육아를 할 때 입었던 목 늘어난 면티들을 버리고 포근하고 따끈하고 약간은 까실거리는 니트를 입고 카디건을 걸쳤다. 바람에 카디건이 날리면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낙엽이 밟고 싶다. 가을이 정말 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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