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발레리의 문장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by 레마누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중학교 때 내가 제출한 좌우명이다. 친구들이 정직이나 성실, 도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어디선가 본 이 두 문장에 꽂혀 있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책 속의 문장은 멋졌지만 내게 바람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먼저 인사했다. 우리 집은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졌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걷다 보면 온몸이 아팠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면 안경에 김이 꼈다. 아무리 로션을 많이 발라도 볼이 짝짝 갈라졌다.


추운 동네에 살면서 서귀포여고에 다녔다. 서귀포는 겨울에도 따뜻했다 첫차를 타러 갈 때면 귀가 끊어질 것 같이 시렸다. 시내에 사는 친구들은 교복마의만 입었다. 우리 반에서 내의를 입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때 내게 바람은 시련이었고, 촌스러웠으며, 없어졌음 하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부정적인 바람이 언젠가부터 나를 살리는 힘이 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바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보잘것없는 내 삶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 사춘기가 끝났다. 철이 들기까지 오래 걸렸다. 십 대 시절을 바람과 함께 울고 웃었으며 보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책을 읽는다. 상황에 딱 맞는 책을 읽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힘을 얻는다. 그럴 때가 있다. 장석주의 <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를 읽다 반가운 문장을 만났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 폴 발레리라는 프랑스작가가 쓴 '해변의 묘지'라는 시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그동안 단면만 보고 감탄을 하고 있었다.



사는 게 힘들 때 바다로 달려와서 고갈된 생의 의지를 충전시키곤 했다. 바다 앞에 서면 자꾸 살고 싶어 진다.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저 유명한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고 노래했듯이 바다는 늘 새로운 생에의 의지를 북돋우는 곳이다.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평론가 김현이 번역한 <해변의 묘지>를 표지가 닳도록 읽어서 어떤 부분은 외울 지경이다

-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 中 -





살던 곳에서 차로 십 분 거리에 아름다운 해안이 있었다. 나는 종종 할아버지의 스쿠터를 빌려서 바닷가에 갔다. 무슨 일이 있을 때도 있었고 아무 일도 아닌데 몹시 흔들릴 때도 있었다. 바다를 보러 가는 데는 모든 게 이유가 됐다. 혼자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바다는 나를 알고 있는 것도 같았고, 내게 관심이 없는 것도 같았다. 오랫동안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보였다. 울고 싶어서 갔다가 눈물을 닦으며 돌아오곤 했다.


내게 서귀포의 어느 바다가 그랬듯 폴 발레리는 지중해에 접한 프랑스 항구 도시 세트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며 자랐고, 다시 세트 해변에 있는 묘지에 안장될 만큼 바다는 시인에게 중요한 이미였다고 한다.




젊었을 때, 문학에 심취했던 발레리는 한 사건을 계기로 실존적 위기를 겪었고, 그 뒤로 매일 동틀 무렵 자신의 생각을 글과 데생 등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이에'라고 불리는 이 노트를 51년간 216권을 남겼다.



<폴 발레리의 문장들>은 '카이에'에서 아포리즘을 모은 책이다. 삶, 인간, 자아, 문학, 정신에 대해서 쓴 아포리즘은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알지도 못한 채 줄곧 내기를 건다. 그러다 내기에 지고는 당황한다.


진짜 '속물'은 지루할 때 지루하다고 털어놓기를 겁내고, 재밌을 때 재밌다고 털어놓길 겁내는 자다.


인간은 가는 건 생각하는데 돌아오는 건 잘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인간의 삶을 글로 쓴다. 그의 업적, 그의 행위들을. 그가 한 말과 사람들이 그에 대해 한 말을. 그러나 그 삶에서 가장 깊은 체험은 빠진다. 그가 꾼 꿈, 개별적인 감동, 국지적 통증, 놀라움, 눈길, 그가 좋아했거나 그를 사로잡았던 이미지들, 어떤 결핍의 순간에 그의 내면에서 떠올라 흥얼거렸던 노래. 이 모든 것은 알려진 그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그에 가깝다.



사람의 정신은 그것이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가치다





<폴 발레리의 문장들>을 읽으며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정신과 언어의 힘을 느꼈다. 매일 새벽 5시에 머리에 떠오르는 날것의 생각들을 쓰고 다듬었다고 한다. 그가 "아침 정신 운동"이라 불렀던 습관은 51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발레리는 그것을 '항해일지'라고 불렀다. 사색과 탐구의 시간들. 오전의 지적 항해의 한 부분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https://blog.naver.com/seihwanny/221720721789


폴 발레리가 사랑했던 남프랑스의 바닷가. 그리고 발레리의 무덤이 있는 <세트의 해변의 묘지>

가고 싶은 곳이 또 한 곳 늘어났다.


그의 묘비에는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이 새겨있다.

"신들의 평온을 길게 바라보는 눈길은 / 오, 사유 끝에 누리는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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