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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Oct 15. 2023

엉킨 실 풀듯이

마음을 풀다



풀다 어휘등급



1. 동사 묶이거나 감기거나 얽히거나 합쳐진 것 따위를 그렇지 아니한 상태로 되게 하다.           


2. 동사 생각이나 이야기 따위를 말하다.           


 3. 동사 일어난 감정 따위를 누그러뜨리다. (네이버 어학사전 참조)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뜨개질을 했다. 찬바람이 불 때쯤 바늘을 잡고 두 달 정도 낑낑대면 카디건이나 조끼가 완성됐다. 겨울밤은 길었고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지금은 9시만 되면 눈꺼풀이 절로 감긴다. 낮에도 할 일이 많아서 뜨개질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흔들의자에 앉아  카디건을 뜨고 싶을 때가 있다.




처음 뜨개질을 배운 건 결혼하고 나서였다. 갑작스러운 유산에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 있었다.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다. 눈물이 계속 나왔다. 남편은 친정에라도 갔다 오라고 했지만 모든 게  다 싫었다. 스물아홉이었고 처음 맞보는 아픔이었다.




어느 날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지만 막상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동네 뜨개방이었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다. 뜨개질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고 했더니 뜨개방선생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뭘 만들고 싶으세요?


-카디건요.




겨울에 절에 가면 할머니들이 많이 입는 카디건이 있다. 하얀 실로 짠 전통무늬카디건이 떠올랐다.



-저는 검은색으로 할게요.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얼마나 생각이 없었는지.


안뜨기, 겉 뜨기도 모르면서 다이아몬드와 꽈배기와 좁쌀무늬가 현란하게 들어간 옷을 뜨겠다고 말했다. 눈도 안 좋으면서 하필이면 검은색 실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이었다.




뜨개방은 9시에 문을 열었다. 10시쯤 가서 5시에 돌아왔다. 선생님과 다른 분들과 점심을 먹으며 뜨개질을 했다. 백조로 변한 12명의 오빠에게 줄 조끼를 뜨는 공주처럼 말없이 바느질만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살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뜨개질을 하면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프다. 그러면 누워서 손을 움직였다.




무모하고 맹목적으로 전통무늬카디건 뜨는 것에 집중했다. 100 사이즈의 남자카디건을 떠서 남편에게 선물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나는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렇게 뜨개질을 하던 어느 날 실이 엉켰다. 실타래를 살살 풀면서 뜨개질을 해야 하는데 무늬가 틀려서 풀고 다시 감아서 뜨다 보니 어느 순간 실이 엉킨 것이다.  짧으면 잘라서 이으면 되는데 실 한 타래가 다 엉켜서 자를 수도 없었다. 짜증을 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실들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복잡하게 엉켜있는 실들도 처음과 끝이 있다. 그것만 찾아내면 된다. 쉽게 찾아내면 문제가 아니다. 복잡하고 단단하게 꼬여있는 실들을 하나씩 잡아당겨보면 처음실을 찾을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빠르고 강한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들여다보고 공을 들여야 풀리는 것들이 있다.




뜨개질을 하면서 나는 내 마음을 풀어내고 있었다. 결혼생활의 낯섦과 유산으로 인한 분노와 원망으로 응어리진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평생 살아가려면 조금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었다.

캐시미어로 짠 가디건, 지금도 즐겨입고 있다




결혼 7년 동안 3번의 유산을 겪으며 나는 많은 옷을 떴다. 남편에게 처음 선물했던 전통무의 검정카디건을 시작으로 남편과 똑같지만 밤색의 내 카디건, 남동생이 교복남방 위에 입을 남색조끼,  가볍게 걸칠 카디건 등등을 뜨며  천천히  자신을 단련시켰다.



딱 세살때 입으면 예쁜 변형전통무늬가디건


그렇게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임신을 했다. 그때도 뜨개방을 찾았다. 이번에는 뱃속의 아이가 입을 카디건을 뜨기 위해서였다.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실과 디자인을 골랐다. 내 아이가 입을 거라고 생각하고 좋은 캐시미어를 선택했다. 아이들은 금방 큰다고 하지만 딱 그 순간만큼이라도 예쁘게 입히고 싶었다.



셋째가 태어나면서 나의 뜨개질은 끝이 났다. 지금도 뜨개방을 지날 때면 문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찬바람이 불면 니트옷을 꺼내듯 본능적으로 나는 포근하고 따뜻한 것에 끌린다. 아직은 아니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는 요즘이다.


돌때 입히려고 짠 전통무늬조끼


19년 전에 뜬 나의 첫 카디건은 작은 동생네 집에 있다. 남편은 자기는 니트옷이 안 어울린다며 입지 않았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왔던 동생이 예쁘다고 하길래 줬다. 제부는 지금도 겨울이면 그 옷을 잘 입고 다닌다. 아무리 좋은 옷도 안 입으면 소용이 없다. 누구라도 잘만 입어주면 감사한 일이다.



 두 번째 짰던 밤색카디건은 엄마가 입었다. 엄마가 따뜻하고 예쁘다며 탐을 냈다. 그때 생각에는 또 뜨면 되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기꺼이 엄마에게 드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물건을 모두 태웠다. 그때 카디건도 태웠다. 다른 건 다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카디건을 태운 건 후회한다.



꼬여 있는 일들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생각하다 보니 예전 일들이 떠올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중심이 있는 일들이 서로 엉켜 있다. 짜증이 나서 쳐다보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살아도 살아졌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언젠가 풀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마음이 불편했다.



옷장정리를 하다 오래전 뜨개질로 만든 옷들을 봤다. 지금은 입을 사람이 없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질하고 있다. 내게는 소중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옷일 뿐이다. 내 마음이 간절하다고 다른 이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나는 나대로 지키면서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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