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이 어때서?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중학교 2학년때 첫사랑이자 짝사랑을 앓았다. 드라마처럼 꽃비가 내렸고 귀에서 종이 울렸다. 매일 밤 그의 이름을 적고 편지를 썼다. 그가 동네 선배와 사귀고 있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랑에 그런 고난쯤은 있어야 했다. 책으로 배운 사랑은 온통 아픔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만을 바라봤다. 그가 졸업선물로 준 일기장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사랑 시를 적었다. 그때 내가 처음 읽고 외웠던 시가 바로 유치환의 <행복>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란 말을 읊조리며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유치환의 <행복>은 사랑한다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편지를 쓰고 그 순간의 기쁨과 설렘을 노래한다. 내가 지금 충분히 사랑하고 있음에 행복하다는 시인의 목소리는 짝사랑에 눈물짓던 내게 큰 위로가 됐다.
내 끈질긴 구애에 그는 가끔 답장을 하거나 선물을 건넸다. 공중전화에 십 원짜리 동전을 잔뜩 들고 전화를 걸었다. 그가 받으면 끊었다. 를 반복했다.
정작 그가 만나자고 하면 핑계를 대며 피했다. 그를 좋아했지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면 환상이 깨질 것만 같았다. 십 대의 나는 현실과 상상 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일기장에 적었다. 한쪽 면에 있는 아름다운 문구들에 마음을 뺏겼다. 사랑 시들을 읽으며 한없이 설레는 마음을 달랬다. 현실 속 사랑은 힘들지만 시를 읽는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었다.
유치환의 <행복>은 나를 위한 완벽한 시였다.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언정 사랑하였기에 나는 행복하여라."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까?
이루지 못한 사랑은 끝내 가슴에 남는다.
좋은 시나 유행가가사를 따라 쓰며 마음을 달랬던 십 대의 내가 오래된 일기장 속에 있었다. 유치하고 멋이 잔뜩 들어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 정성으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이렇게 시나 적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