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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Nov 09. 2023

만족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반에서 제일 몸집이 작고 소심한 아이가 걱정됐다. 유치원 때도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건 적이 없던 아이였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다른 친구들이 앞다퉈 손을 드는데 딸은 눈물먼저 글썽거렸다. 아이의 학교적응이 심히 염려됐던 나는 반대표를 자원했다. 한 달에 한번 반모임을 했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서 아이의 기를 살려주려고 했다. 

 


부대표인 철수 엄마는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화려한 외모와 잘 가꾼 피부가 매력적이었다. 말도 청산유수처럼 잘했다. 우리는 자주 통화했다. 틈만 나면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나를 깍듯이 언니라고 불렀다. 내가 한번 사면 다음에는 상대가 한번 사는 방식으로 만남을 이어갔다. 



딸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친구가 생기고 학교도 생각보다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나도 학교활동이나 엄마들과의 모임에 덜 신경을 쓰게 됐다. 그래도 철수엄마와는 계속 만났다. 철수엄마는 모르는 게 없었고,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철수엄마의 연락이 뜸해졌다. 안부톡을 보내면 시큰둥한 답이 돌아왔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막는 느낌이었다. 만나자는 말에도 딱히 날짜를 잡지 않는 것이 밀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영문도 모르게 철수엄마와 멀어졌다.



 철수엄마는 유명한 다단계화장품 영업사원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만날 때는 화장품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공과 사를 구별하는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빼고 다른 엄마들은 다 그 화장품을 구입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따로 모임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철수엄마의 주도하에 1박 2일 놀러도 간다고 한다. 나만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조금 섭섭했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했으면 그동안의 인연도 있고 해서 못 사줄 이유도 없었는데 왜 나에게만 말을 안 했을까. 싶었다. 남편은 화장품 안 사줬다고 인연을 끊은 사람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위로라고 해줬다. 



 우리는 이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인스타에서 가끔 보지만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철수엄마는 여전히 인스타 안에서 빤질거리는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보여줬던 호감 어린 미소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어진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렇게 호의적일까? 뭘 빼먹으려고 입 속의 사탕처럼 달콤하게 구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예쁘다고 하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예쁘다고 하면 안 예쁜 걸 뻔히 아는데 왜 예쁘다고 하지?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의심을 하게 된다. 칭찬을 칭찬으로 받지 못한다. 누군가 자꾸 연락이 오면 갑자기 이 사람이 왜 그러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외롭다. 외로운데 편안하다. 할 말만 하고 살아서 삶이 간단해졌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번지르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청산유수 같은 말보다 짧고 간결한 말이 듣기 좋다. 무뚝뚝한 말속에 툭툭 던져지는 유머가 섞여 있다면 더 좋다. 



 나는 말보다 글을 신뢰한다. 말로는 다 못한 것들을 자신만의 글로 풀어내는 사람이 좋다. 그래서 전화통화보다 편지를 선호한다. 생각을 굴리고 굴려 제대로 된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고뇌를 사랑한다



 나는 글로 쓴 걸 실천하는 사람이 좋다. 글로는 태산도 옮길 것 같은 사람이 정작 만나보면 백면서생일 경우가 있다. 생각을 글로 쓰고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면 좋은 자극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입바른 소리를 잘하고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생각 없이 남발할 때가 있다.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김칫국먼저 마실 때가 많다. 뜬구름처럼 떠다니는 생각들 중 하나를 붙잡고 하루 종일 뭐라도 된 양 글로 표현하기 위해 낑낑대기도 한다.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고 마치 당장이라도 이룬 것처럼 굴지만 정작 하루도 못 지킬 때도 있다. 나는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에 현혹되지 않고 매일 흔들리는 마음을 글로 쓰며 하루를 채워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생각이 글로 나올 때의 짜릿함을 아는 사람이다.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런 바램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않으며,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살고 있다. 적게 가짐으로 크게 꿈꿀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은 '오로지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

* 요즘 떠들썩한 펜싱선수의 사건을 보며 떠오른 생각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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