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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Nov 11. 2023

내가 사랑하는 미드 "프렌즈"

굿바이, 챈들러 빙

내가 사랑하는 미드 "프렌즈" 시즌 6 

에피소드 7화의 한 장면.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자란 피비는 자립심이 강하고 틀에 박힌 삶을  못 견뎌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카페에서 부르는 자작곡도 제멋대로다. 


레이첼은 의사 아버지 밑에서 편안하게 자랐다. 아버지의 말만 잘 들으면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만큼 부잣집 딸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느라 정작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모른 채 성인이 되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피비와 함께  살게 된 레이첼은 처음 주어진 자유에 흥분하며 좋아했지만 얼마 안 가서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피비에게 조금씩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두 사람은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했다.


조깅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주위를 의식하며 예쁘게 달리는 레이첼과 달리 오로지 달리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어떤 모습으로 달리는지는 상관하지 않는 피비.



레이첼은 피비의 달리는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친구들에게 피비와 같이 달리는 게 창피하다고 말한다. 마치 폴짝 뛰는 개구리와 육백만 사나이를 합쳐놓은 것 같다고 말하는 레이첼.


상대가 이해안되는 건 피비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뛰는 레이첼에게  피비는 그것도 달리기냐며 자신처럼 달려보라고 권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레이첼은 피비와 함께 하는 걸 피해 혼자 달렸다.


하지만 피비와 대화하면서 생각이 바뀐 레이첼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느닷없이 피비처럼 자유롭게 한 마리 개구리처럼 육백만 달러의 사나이처럼 최선을 다해 달렸다. 처음으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달리는 레이첼을 한번 쳐다볼 제갈길을 갔다. 레이첼이 걱정했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비 말마따나 한번 보고 말 사람들 때문에 그동안 레이첼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깨닫는다.



 레이철은 두 팔을 벌리며 개구리처럼 허우적대며 달리는 피비와 마주한다. 그리고 피비에게 환희에 찬 얼굴로 말한다.


달리기에만 집중하느라 팔과 다리의 모양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레이철은 비로소 자신이 달리기를 순수하게 즐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건 너무 신나고 자유롭고 마음이 편한 경험이었다.


왜 이 장면이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어쩌면 오늘 아침 식탁에서 젓가락질하는 큰딸을 지적해서 큰딸의 눈에 눈물방울 맺게 했기 때문일지도. 



이상하게 큰딸이 하는 젓가락질이나 씹는 모습이 눈에 거슬릴 때가 있다. 정해진 것도 아니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 이상해서 자꾸 지적을 하게 된다. 한참 밥을 먹다 엄마한테 지적을 받았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마치 딸인 모니카를 만나자마자 머리모양부터 귀걸이, 옷까지 지적질만 하느라 바쁜 모니카엄마처럼. 

모니카엄마 별로였는데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랑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음.. 난 모니카 엄마 그 자체였다. 불쌍한 우리 딸ㅜㅜ


딸에게 혹시 내가 이렇게 보이지는 않을까ㅜㅜ

내가 가진 기준과 잣대로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게 엄마의 이기심인지 욕심인지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혼내면서 바르게 키우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조차 맞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습관을 키워주고 싶다. 그런데 그 범위를 모르겠다.



젓가락이나 연필 잡는 법.  음식을 먹을 때 소리 내지 않고 먹는 것.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 등을 바로 펴고 걷는 것. 등등등

아. 나는 정말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큰 딸은 사방이 잔소리인 곳에서 살고 있었구나. 



나는 아이들이 피비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생활하기를 바라면서 레이철의 부모처럼 못 미뎌워서 교문에 숨어 보는 부모였다. 그래놓고서 너는 혼자서 제대로 하는 게 왜 없니? 하고 있다. 나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 아이 앞에서.


가끔 생각한다. 내 성격에 아이가 한 명이었다면 그 아이는 아마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었을 거라고.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면 종이가 타들어가듯이. 나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다. 누구보다 극성엄마가 되어 치맛바람을 제일 앞에서 휘둘렀을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행여나 내가 작고 가여운 아이에게 못 되게 굴까 봐 하느님은 두 아이를 내려주셨다. 덕분에 나는 한 명의 아이에게 집중하는 대신 시선을 세 아이에게 돌릴 수 있었고, 혼을 내도  세 명에게 분산을 하기 때문에 세 남매는 타격을 적게 입을 수 있게 됐다. 



정말 다행이다. 아이가 셋이어서. 나는 매일 자유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아이들에게는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피비처럼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라면서 레이철처럼 반듯하게 뛰기를 강요했다. 



이 글은  반성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조금 더 거리를 두고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다짐하는 글이기도 하다. 




2023년 10월 28일 미드 <프렌즈>의 6명 중 한 명이었던 매튜 페리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고 가슴이 철렁했다. <프렌즈>는 내가 제일 사랑했던 미드였다.


  결혼 초기의 어려움을 <프렌즈>를 보며 견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케이블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졌었다. 봤던 걸 또 돌려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찾아서 보기도 했다. 시즌이 끝나도 생각날 때마다 찾아봤다. <프렌즈>가 방영됐던 십 년 동안 나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나는 그들과 친구였고, 함께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매튜 페리가 연기했던 챈들러 빙은 이상한 남자였다.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불편할 때마다 쓸데없는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비꼬는 말을 잘하고, 조언을 못 했다. 인간관계 특히 이성관계를 어려워했다. 서툴고 절망적이고 사랑이 절실한 남자였다. 그동안 미국영화에서 보던 당당하고 멋진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지질한 캐릭터였다. 


 그의 죽음을 듣고. 일 년 전에 썼던 글이 생각나 퍼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의 일정 부분은 <프렌즈>의 영향을 받았다. 한 시대가 저무는 기분이 들었다.


굿바이 챈들러 빙, 부디 그곳에서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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